파리 대학교 총장(1395~1429). 프랑스의 신학자, 신비가, 저술가, 설교가. 14세기 프랑스와 유럽의 정치, 종교, 신비 신학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
〔생 애〕 1363년 12월 14일 프랑스 르텔(Rethel) 근처의 제르송 레 바르비(Gerson-lez-Barby)에서 태어난 그의 본래 이름은 장 르 샤를리에(Jean Le Charlier)이다. 1377년 파리에 있는 나바르(Navarre) 신학교에 입학해 공부했으며, 후에 추기경이 된 아이(Pierre d'Ailly, 1350~1420)의 제자가 되었다. 후에 아이는 그를 대학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1381년 제르송은 신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1390년 신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1392년 12월 18일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석사 학위 이전부터 그는 설교자로 활동하였고 1392년 부르고뉴의 필리프 공작의 보호를 받았으며 그의 이름으로 가난한 사람을 도와 주는 일을 하였다. 1394년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는데, 이때 당시의 시대 풍조에 따라 태어난 지방 이름을 따서 제르송이란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4월 13일 아이가 퓌(Puy)의 주교로 임명되자 그 후임자로 노트르담 성당과 파리 대학교의 총장이 되었다.
이후 그는 대학에서 신학을 강의하면서 신학자, 저술가, 설교자로 활동하였다. 1397~1401년까지 그는 브뤼헤(Bruges)에서 지냈는데, 이 기간 동안 로이스부르크(Jan van Ruysbroeck, 1293~1381)의 영향을 받은 플랑드르와 독일의 영성을 접하였다. 이곳에서 그의 유명한 논문 〈이교 시대의 행동 방법론〉(De modo se habendi tempore schismatis, 1398)이 집필되었다. 1400년 초에 앓은 병을 계기로, 그는 영적 경험을 하였고 세속적인 활동보다는 정화와 완전을 향한 신비 생활에 마음이 끌렸다. 그래서 파리 대학교의 총장에서 물러나려고 하였으나, 부르고뉴의 공작은 그의 사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401년에는 마르코 복음 주해 강의를, 1402년 말부터 1403년 초까지는 후에 발간되는 《신비 신학》(De Mystica Theologia)의 1부 내용이 될 강의를 하였다. 서구 대이교(1378~1417) 기간이었던 이 시기에 아이와 제르송은 교회 일치를 위해 함께 노력하였다. 제르송은 저술과 설교로 교회의 일치를 도모하였다. 그리고 동료 교수들에게 극단을 버리고 온건한 태도를 취하라고 권고하였다. 1407년 11월 부르고뉴의 새 공작 장(Jean sans Peur, 1371~1419)의 명령으로 오를레앙의 루이가 살해되자, 제르송은 폭군 살해자 이론을 펴는 사람들과 논쟁을 하였다. 또한, 장의 고문으로 변호사이자 프란치스코회 수사인 프티(Jean Petit)가 앞세운 폭군 살해 정당론에 대항해, 결국 파리의 주교와 파리 대학교 학자들로부터 이 논리를 단죄하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결과 부르고뉴 공작의 분노와 적대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제르송은 1408년 파리에서 《신비 신학》을 출판하였다. 또한 그는 소논문 〈교회의 일치〉(De Unitate Ecclesiastica, 1408)를 통해 교회 일치를 주장하면서,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고(Pax hominibus, P. II, 145) 불변하고 영원하며, 유일하고(Propositio coram Anglicis, P. Ⅱ, 124 ; De Auferibilitate sponsi ab Ecclesia, P. Ⅱ, 209~224) 어떤 것으로도 대처할 수도 분리시킬 수도 없는 신랑이다(Ambulate, P. Ⅱ, 205)라고 하였다. 그리고 교회 안에 일치가 없다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에 의거하는 교회가 아니라고 하였다. 교회는 보이지 않는 머리로서 그리스도를 가지고 보이는 머리로서는 교황을 가지지만, 교황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이차적인 머리에 불과하다. 만약 교황이 자신이 원해서건 아니면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신비체의 하나인 교회를 유지하는 데 위배되는 행동을 할 때, 그가 아직 교황직에 있다 하더라도 그를 묶어 감옥에 집어넣거나 바다에 던질 수 있다(De unitate, GI VI, n. 272, 137~140)고 주장하였다. 1413년 여름 장 공작은 사람들을 선동시켜 그를 죽이려고 하였기에 제르송은 피난하여 몇 달간 숨어 살았다.
콘스탄츠 공의회와 공의회 우위설 : 당시 그리스도교 윤리에서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던 그의 신학적 영향은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에서 발휘되었다. 그는 아이와 함께 다른 안건은 물론, 공의회에서 〈교황의 축출〉(De auferibilitate Papae) 안을 통과시키는 주된 역할을 하였다. 교회의 일치를 위해 노력했던 그는 초기의 4차 공의회까지는 교황에 의해 소집된 것이 아니며, 전세계가 공인하는 유일한 교황 선출을 위해서는 황제, 주교뿐 아니라 평신도들이라도 공의회를 소집할 수 있다는 주장을 지지하였다. 그는 교회가 하나인 교회로 다시 회복하기 위해 공의회의 우위성을 주장하였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종결시키기 위해 서로 자신의 권한만을 내세우는 두 교황의 권위를 능가하는 정당한 권위를 찾는 데 노력하였고, 결국 공의회에 최고의 권한을 줌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공의회 소집에 대한 합법성을 어떻게 하느냐는 점이었다. 교회법적으로는 공의회 소집은 교황에 의해서만 가능하였다. 공의회에 교회의 최고의 권한을 부여할 때, 교황의 권위는 공의회에 종속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교황권에 모든 것을 맡긴다는 것은 문제 해결을 위해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제르송은 1415년 3월 23일 공의회의 교부들 앞에서 한 강론에서 교회의 특성인 '하나인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교황과도 분리될 수 있고, 교황은 교회나 교회를 대표하는 공의회의 규칙에 자신을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교회는 교황의 잘못을 교정할 수 있고 그의 권력에 한계를 정하고 조절할 수 있는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대립 교황인 요한 23세(1410~1415)의 면직을 요구하였고, 교황의 동의 없이도 공의회를 소집할 수 있으며(De Unitate, GI VI, n. 272, 137~140) 공의회의 결정은 전세계 모든 신자들에게 적용할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본당 신부들도 주교들처럼 공의회에 초대되어 자신의 의견을 표명할 수 있고, 어떠한 신자라도 예외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함으로써 교회 안에 민주주의 정신이 필요함을 언급하였다. 나아가 주교보다 법에 대한 지식이 많은 교회법이나 시민법 박사들도 공의회의 결정에 한 몫을 담당할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공의회가 진행되는 동안 그는 자신이 표명한 의견과 사상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짐을 감지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공의회에서 큰 몫을 담당하였고, 많은 분쟁과 논쟁거리를 남겼다.
후기 생애와 활동 : 1418년 5월 15일 제르송은 콘스탄츠를 떠났다. 공의회가 끝났지만 부르고뉴 공작의 보복이 무서워 파리로 돌아갈 수 없었다. 또한, 파리 대학교에서는 그가 주장한 공의회 우위설 때문에 그를 해고하고 처벌을 내려야 한다는 분위기가 일었다. 그래서 그는 공의회 동안 알게 되었던 멜크(Melk) 아빠스의 도움을 받아 그곳에 은거하였다. 부르고뉴 공작이 살해(1419.9.10)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프랑스로 돌아오지만, 파리가 아닌 그의 동생이 수도원장으로 있던 리용의 첼레스티노 수도원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그는 많은 저술을 하는데, 1424년 《신비 신학의 해명》(Elucidatio scolastica Theologiae Mysticae)이란 책을 집필한 뒤 전적으로 은거와 기도, 명상 그리고 어린이들을 교육시키는 데 전력을 다하였다. 그가 살아온 삶과 그리스도교의 계명을 혼합시켜 제르송은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어린이를 위한 교육서 중에서 유명한 것으로는 《어린이들을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하는 방법》(De parvulis ad Christum trahendis)이 있다.
제르송은 1429년 리용에서 아르크의 요안나(Jeanne d'Arc, 1412~1431)에 대한 문제에 개입하였다. 그는 자신의 삶을 인도했던 원칙에 입각하여 요안나를 변호하였다. 그녀에 대한 비난은 근거가 없는 것이며, 그녀가 받은 예언과 기적을 포함한 비범함은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였다. 또한 신앙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신심 행위를 부추기는 것이기 때문에, 그녀의 진실성과 솔직함 그리고 그녀의 행위 안에 보여진 신적인 초자연성을 인정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성모님과 성 요셉에 대한 신심 증진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리용에서의 마지막 10년은 제르송에게 항상 투쟁해야 했던 그의 삶에서 가장 감미로운 시간이었다. 그는 《아가서에 대한 논고》(Tractatus cantica canticorum)를 끝낸 3일 후인 1429년 7월 12일 리용에서 세상을 떠났다.
〔영성과 사상〕 14세기는 그리스도교 영성사에 있어 중요한 세기였다. 서구 대이교는 신앙의 기반을 흔들었고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청하는 청원 기도들이 교회 안에서 발전하였다. 많은 나라에서 신비주의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제르송의 저서 중 대표적인 《신비 신학》은 정치와 사목, 교수 활동 등의 일로 피곤해져 있던 그의 정진과 평화를 위해 착수된 것이었다. 가톨릭 영성사에서 이 책은 영성 신학의 개론으로 소개되고 있다. 또 한 이 책은 아레오파지타의 디오니시오(Dionisius Aeropagita)에서 시작하여 아우구스티노(354~430), 가시아노(360?~432/435), 교황 그레고리오 1세(590~604), 보나벤투라(1221~1274) 등 뿐 아니라 13세기 플랑드르 신비가들의 사상까지 통합하고 있다.
이 책에서 두 가지 논쟁을 발견할 수 있는데, 첫 번째 논쟁 대상은 섬세한 언어 정식(말장난)으로 낙후된 당시의 스콜라 신학에 대한 것이었다. 이 신학에 의하면 인간의 지성과 논리로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제르송은 이들을 텅빈 지성주의자들이라고 비판하면서, 이런 신학 안에서는 어떠한 지혜, 사랑, 평화, 기쁨을 만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의하면 하느님은 지성으로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인간 마음에 본질적으로 내재한, 그분 사랑의 현존에 기반을 둔 애정적 인식으로 가능하다. 즉 이성적인 탐구보다는 마음을 순수하게 하고 단순하게 하는 회개의 감정이 하느님을 인식하는 데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두 번째 논쟁으로 인간의 감성과 애정만을 중시하는 당시의 신비 신학을 비판하였다. 이 신학에 의하면, 인간은 하느님과의 본체적인 합일이 가능하며 황홀경 체험을 통해 이 세상에서 신적 정수를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사도 바오로의 율법에 우선하는 영적 인간의 자유를 축소시켜 해석함으로써 신비 경험을 한 성화된 인간은 죄를 범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사상을 따를 때 도덕적 · 윤리적 문제만이 아니라 교회의 교의 문제에도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즉 신비 경험이 하느님에 대한 완전한 경험이라면 교회에서 가르치는 묵상 기도, 성서를 통한 계시의 유일성 문제, 육화의 구원적 의미가 위험스럽게 되며 교회의 법, 조직으로서 교회, 성사의 의미가 상실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르송은 하느님에 대한 인식은 애정의 몽롱함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성의 정확한 분별성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였다. 예를 들어 하느님과의 합일에서 인간은 완전 용해되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불에 달아오른 철과 같다고 하였다. 즉 철은 자체 본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불이 된다는 것이다.
그가 로이스부르크를 포함한 당시의 신비주의 경향을 비판한 것은 아마도 자신과의 싸움일 수도 있다. 그에 의하면, 초자연적인 실제를 명상하는 데는 정신에 의한 것과 마음에 의한 것이 있지만, 이성적인 명상이 애정적인 명상으로 변형되지 못할 때 영혼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확언하였다. 애정적인 인식에 기반을 둔 하느님과의 합일은 황홀경, 관상, 명상 등의 경험을 동반한다. 그리고 합일을 이루는 순수 명상을 위해 어떠한 상(像)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동시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수난 묵상을 중요시하지 않는 이들을 비판하였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으로 가는 길이며 문이고 승강기이기 때문이다.
《신비 신학》은 철학적 · 추상적인 것을 다룬 1부와 실천적인 것을 다룬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신비 신학이 외적이고 지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내적 경험에 의거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내적 경험에 기반을 둔 신비 신학은 그것이 진정한 인식인 만큼 철학이며 이성과 감성이 합일된 풍부한 학문이 된다. 모든 인간은 내적 경험을 통해, 인간의 본성 안에서 감지되는 사랑을 통해 하느님에 대한 진정한 인식을 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이 경험이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신학은 학문적이며 교의적인 배움과는 상관이 없다. 제르송은 이것을 신비주의라 부른다. 반면, 사목적인 특성을 지닌 2부에서는 신비 신학이라는 말이 맞지 않을 만큼 실천적인 것을 다룬다. 여기에는 명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 조건과 수단을 다룬 12개의 고찰이 제시되어 있다. 즉 ① 자신의 성소와 본연의 상태를 잘 파악할 것 ② 자신의 기질과 경향을 잘 파악할 것 ③ 교회 안에서의 자기 임무가 무엇인지를 파악할 것 ④ 활동보다 명상적 삶을 택함으로써 더 나은 완전을 위해 정진할 것 ⑤ 가능하면 번잡하고 피상적인 일들을 피하고 수도원의 분위기를 익힐 것 ⑥ 배움에 대한 허영심과 쓸데없는 호기심을 버릴 것 ⑦ 평정 상태에 있도록 노력하며 인내를 실천할 것 ⑧ 애정과 열정의 근원을 알 것 ⑨ 명상에 필요한 시간과 적당한 장소를 선택할 것 ⑩ 수면이나 먹는 것을 조절하며 지나친 금욕이나 극단을 피할 것, ⑪ 명상에 필요한 규칙을 지킴으로써 경건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도록 할 것 ⑫ 탈 혼에 방해되는 상(image)이나 개념들을 마음에서 없앨 것 등이다. 이러한 것은 인간의 마음을 단순하게 만들어 명상으로 이끈다. 12가지 조건은 일반인에게 쉬운 길은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완전한 것을 향한 내적인 집중은 모든 이들이 할 수 있고, 이 훈련을 통해 하느님과의 초자연적 일치를 가질 수 있다.
민감성에 기반을 둔 지성의 중요성은 예언에 대한 판단에도 나타난다. 당시는 수많은 예언들이 난무하였지만,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인 진실한 예언은 적었음을 감안한 그는 진실한 신비가와 거짓 신비가를 구별하는 성령의 식별 방법을 연구하였다. 그는 별자리를 보고 점을 치고 예언하는 이들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신비주의가 지닌 자체의 성격은 인정하였다. 그의 성령 식별 방법은 오늘날까지 진정한 계시와 거짓 계시를 구별하는 비판 기준이 되고 있다. 제르송에 의하면, 진정한 예언가와 신비가가 되기 위한 네 가지의 조건이 있다. 첫째, 어떤 것을 예언하였을 때 그것이 성령에 의한 것인지 아닌지를 판명해야 한다. 이때 계시받은 자의 육체적 · 심리적 상태도 중요하다. 둘째, 만약 판명되지 않을 때 계시받은 말에 대한 해석을 요구할 수 있다. 셋째, 진정한 예언은 항상 성서와 이성에 부합되는 것으로 도덕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천사에 의하거나 예언적인 계시가 윤리 도덕 원칙에 부합하지 않을 때, 그것이 어떤 명확한 지시나 특별한 감면을 받지 않았다면 기도 속에서 신비가는 그 영을 분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넷째, 그가 받은 은사를 남과 나누려고 할 때 예언자가 가져야 하는 태도는 기적적이고 예언적인 은사 자체에 집중하지 말고 남과 나누기 위한 분별, 겸손, 인내, 진실, 그리고 사랑이 있는 자신의 삶 자체로써 증명해야 한다. 예언이나 환시가 이성에 기반하지 않고 개인적인 의향 안에서만 해석된다면, 역사 안에서 보여졌듯이 큰 위험을 가져올 수 있다. 그의 조심성과 사려는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제기되었던 스웨덴의 성녀 비르지타(Birgitta, 1303~1373)의 시성 결정에도 나타난다(1415.2). 성녀는 아비뇽의 교황을 로마로 귀의시키기 위해 많이 노력한 사람이다. 제르송은 공의회에서 다른 위원들과 함께 성인품에 오르는 이들의 삶과 사상을 비판 기준에 따라 검토해야 한다는 안을 내놓고, 정치적 색채를 많이 띠는 비르지타의 성인품에 대한 결정을 보류하자고 건의하였다. 그러나 그는 비르지타 성녀의 환시에 담긴 예언에 대해서는 분별과 사려를 가져야 하지만, 새로운 예언을 완전 거부할 수도 없다고 주장하였다.
〔저 서〕 제르송은 라틴어와 프랑스어로 총 540개의 글을 썼고, 편집된 것만 434개에 달한다. 그의 저서들은 주로 양심의 문제, 학술, 설교, 기도 등을 다룬 소책자들로 되어 있다.
주로 1395~1400년 사이에 프랑스어로 쓰여진 것은 영적 성장을 위한 것인데, 예를 들면 《관상의 산》(La montagna de contemplation), 《가난한 영성》(La mendicité spiritualle)이 있다. 라틴어로 쓰여진 것은 대상이 파리 대학교의 학생들과 콘스탄츠 공의회의 교부들, 그리고 주로 리용의 수도자들인데 《영혼의 영적인 삶》(De vita spirituali animae, 1398)과 《사변적 및 실천적 신비 신학》(De Mystica Theologia speculativa et pracitica, 1402~1403), 《영의 식별》(De probatione spirituum, 1415) 등이 있고 이 외에도 수많은 저술들이 있다. 그의 저서에는 실천적인 면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높은 수준의 영성이 발견된다.
제르송은 리용에 머물던 시기를 제외하고는 많은 설교를 하였다. 설교집은 라틴어와 프랑스어로 되어있는 것을 모두 포함하여 64개가 전해진다. 그의 설교 내용은 획일적이지 않고 대상에 따라 달라지지만 주로 영성적인 면을 강조한 윤리 도덕적 주제로 되어 있다. 즉 무절제, 방종, 도덕적인 타락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하느님의 정의를 강조함으로써 회개를 부추기고 있다. 그러나 그의 설교는 항상 듣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위안을 주는 말로 끝난다. 이 외에도 그의 편지 86통과 라틴어로 쓰여진 시만 101편이 있다. 그는 신학 외에도 철학, 법학, 정치학 등에서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평 가〕 제르송의 공의회 우월설(Conciliarismus)에 대한 주장은 오류였지만, 비극적이고 격동적인 그 시대 상황을 감안할 때 부정적으로만 평가할 수 없다. 그것은 그의 교회론이 사도 바오로에 기초한 성서적인 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제르송에 대해 역사가들은 여러 입장을 취한다. 예를 들면 갈리아주의자(Richer, Du Pin, Lenfant, Le Noble, Bossuet)들은 그를 추앙하고 있고, 일부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A. Jepp, Winkelmann, Bonnechose)은 제르송을 위클리프(J. Wycliff, 1330?~1384)나 후스(J. Hus, 1372?~1415)와 비교한다. 그러나 이 비교는 진정한 가톨릭 정신으로 살았던 제르송의 삶을 볼 때 잘못된 것이다. 이런 경향들은 가톨릭 교회 안에서 제르송에 대해 혹독한 비판을 야기시켰다. 그래서 그를 오컴주의자 혹은 갈리아주의자라고 공박하였다. 그러나 벨라르미노(1542~1621)는 제르송이 처했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여 그가 주장했던 것에 대해 좀 더 호의적인 평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지난 세기부터 교회 내에서 제르송의 사상에 대한 호의적인 분위기가 일어나고 있다.
제르송은 새 신심 운동(devotio moderna)을 프랑스의 상황에 적응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독일의 신비주의를 가장한 신심에 대항하였으며, 로이스부르크의 가르침이 이단자인 에크하르트(J. Eckhart, 1260~1328)의 교리와 같은 형태를 지닌 한 그의 가르침에 내재하는 위험성을 지적했다. 구조적으로 그는 동트는 새 시대를 위한 영성의 진로를 세웠고, 적어도 그 시대를 위해 정감적 영성 신학과 사변적 영성 신학 사이에 조화있는 종합을 이루었다. 사람들은 서구 대이교로 암울했고 위안이 필요했던 유럽 사회에서, 교회의 일치를 위해 전력을 다했던 그에게 '위안의 박사'(doctor consolatorius)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다. 제르송이 사망했을 때 무덤까지 이어지는 사람들의 행렬이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를 기념하기 위해 파리와 리용에 기념상이 세워졌고, 소르본 대학에는 그의 초상화가 보쉬에(J.B. Bossuet, 1627~1704) 주교와 함께 나란히 걸려 있다. (→ 공의회 우위설 ; 서구 대이교 ; 신비 신학 ; 콘스탄츠 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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