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가 기도의 모범으로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쳐 준 기도.
〔내용 풀이〕 주님의 기도문은 신약성서 두 곳(마태 6,9-13; 루가 11,2-4)에 수록되어 있다. 마태오와 루가 복음사가는 이 기도문을 예수 어록에서 베껴 쓰면서 제각기 손질하였다. 루가의 복음서에 실린 짧은 기도문이 어록을 충실히 반영한 반면, 마태오의 복음서에 실린 긴 기도문은 마태오 복음사가가 상당히 가필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스도인들은 마태오의 복음서의 긴 형태에 따라 주님의 기도를 바친다. 이 기도문에는 긴 호칭에 이어 일곱 가지 간구가 들어 있다. 먼저 하느님에 관한 간구 세 가지가 나오고, 이어 우리에 관한 간구 네 가지가 언급된다. 일곱 가지 간구에서 행동하는 주체는 우리가 아니고 하느님이다. 곧 우리의 처신을 거론하기보다는 하느님의 처사를 두고 비는 기도문이다.
호칭—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 예수가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쳤을 때는 하느님을 단순히 아빠라고 불렀을 것이다. 사실 예수는 게쎄마니에서 기도할 때 하느님을 아빠라고 불렀다(마르 14,36). 예수의 영향으로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불렀다(갈라 4,6; 로마 8,15). 아람어 '아빠'(Αββα)는 본래 아기가 자신의 아버지를 부르는 말〔小兒語)이었다. 아기가 어른이 되어서도 그렇게 부르는 경우가 있었는데, 아마도 정감이 가득 담긴 호칭이었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 당시만이 아니라 지금도 절대로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지 않는다. 하느님을 아빠라고 하는 것은 불경스럽다는 이유 때문이다. 루가의 '아버지'는 아빠를 점잖게 옮겨 쓴 것이고, 마태오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유대인들의 하느님 호칭을 따른 것이다.
간구 1—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 직역하면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소서"인데, 직역은 두 가지 이유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 첫째, 하느님을 2인칭 '당신'이라고 일컫는 것은 무례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말에서는 흔히 2인칭 대명사를 생략한다. 둘째, 직역하면 마치 하느님의 이름, 곧 하느님이 속된 것처럼 들린다. 마치 속된 하느님이 거룩하게 탈바꿈하기를 비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간구의 뜻은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 곧 하느님의 거룩하신 모습이 온 세상에 드러나기를 빈다는 것이다. 지극히 거룩한 하느님(이사 6)이 비록 지금은 숨어 있는 것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오래지 않아 종말이 닥쳐 환히 드러나기를 비는 것이다.
간구 2—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 직역하면 "당신의 왕정(王政)이 오소서"이다. 하느님이 임금으로서 와서 다스릴 신정(神政)이 도래하기를 비는 것이다. 그런데 신정이 '온다'고 하는 것은, 신정의 역동성을 가리키는 예수의 독창적 표현이다. 하지만 한글 어감에는 거슬리기에 "아버지의 나라를 세우시며"라고 의역하는 게 옳을 것이다.
이 간구의 뜻은 비정한 인간들의 폭정을 끝나게 하고, 그 대신 자비 지극하신 하느님이 어서 와서 선정을 펼쳐 달라고 비는 것이다. 예수는 묵시 문학의 영향을 받아 종말 신정의 도래를 기원하였다. 묵시 문학을 벗어난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이 우리의 삶과 역사를 주관하여 달라고 비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종말 미래의 신정을 역사 현재의 신정으로 바꿔 기도하는 것이 묵시 문학적인 독소를 제거하는 첩경이라 생각된다.
간구 3—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 직역하면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이다. 이 간구는 마태오 복음사가의 가필이다. 마태오의 복음서에 나오는 '하느님의 뜻'을 살펴보면, 두 가지로 대별된다. 우리를 구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가리키기도 하고(18,14), 우리의 회개를 요구하는 윤리 의지를 가리키기도 한다(7,21; 12,28.31). 앞 문맥인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를 고려하여 셋째 간구를 풀이하면 이렇다. 즉 하느님이 와서 선정을 펴심으로써, 우리를 구하려는 구원 의지를 이루어 달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이 지닌 두 가지 의미를 다 고려해서 풀이한다면, 셋째 간구에 나오는 '하느님의 뜻'은 일차적으로는 하느님이 우리를 구하려는 구원 의지이고, 부차적으로는 우리에게 회개를 요구하는 윤리 의지이다.
간구 4—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 그리스어 '에피우시오스'(ἐπιούσιος)를 여기서는 '일용할'이라고 번역하였지만, 다르게 번역할 수도 있다. '에피우시오스'는 그리스어 문헌 중에서 여기에만 나오기에 그 뜻이 불분명해서, 여러 가지 가설이 있다.
우선, 옛 라틴어 역문에서는 '에피우시오스'를 '나날의'(quotidianus) 빵이라고 번역하였다. 그래서 이 간구를 "오늘 저희에게 나날의 빵을 주소서"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주장의 대표적인 학자로는 스타키(J. Starcky)와 그럴로(P. Grelot)가 있다. 반면 오리제네스(185~253)는 '생존에 필요한 빵'이라고 풀이하였다. 시리아어 공용 성서인 페쉬타(Peschitta, Syr P)에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빵이라 번역하였는데, 이는 오리제네스의 풀이와 가깝다. 이러한 입장을 따른다면, "오늘 저희에게 생존에 필요한 빵을 주소서"가 될 것이다. 이런 주장을 펴는 대표적인 인물은 피츠마이어(J.A. Fitzmyer)이다. 예로니모(347~419)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일명 나자렛인들의 복음서인 《히브리 복음》에서는 '내일의' 빵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오늘 저희에게 내일의 빵을 주소서"가 될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대표적인 학자는 루츠(U. Luz)이다. 그런데 《히브리 복음》에 나오는 '내일의'는 오늘과 모레 사이의 하루를 뜻하기보다는 큰 미래, 곧 종말의 미래를 뜻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런 주장을 하는 학자는 예레미아스(J. Jeremias)와 브라운(R.E. Brown)인데, 만일 그렇다면 "오늘 저희에게 종말 미래의 빵을 주소서"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에서는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빵을 주소서"라고 한다. 이 번역에서는 '나날의 빵'과 '생존에 필요한 빵'을 합쳐 '일용할 빵'이라고 하였다. 그닐카(J. Gnilka)도 같은 견해를 표명하였다.
한국의 성서학자들 가운데 일부는 원전의 '일용할 빵'을 '일용할 떡' 또는 '일용할 밥'이라고 번역하는데, 이는 불필요하게 문제를 만드는 것일 뿐이다. 매일 떡을 먹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떡은 별식인 만큼 '일용할 떡'은 어불성설이다. '일용할 밥'은 그보다 낫기는 하지만 역시 문제가 있다. 밥이라 하면 무의식 중에 쌀밥을 생각하게 되는데, 이스라엘에는 쌀이 생산되지 않기에 성서에는 쌀이라는 낱말조차 없다. 예수 역시 쌀을 구경하지 못했다. 그리스어 원전의 '일용할 빵'은 빵 한 가지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음식 전부를 뜻한다. 부분으로 전체를 가리키는 히브리적 제유법(提喻法, pars pro toto)인 것이다. 한글 역문에서는 일용할 '빵'을 일용할 '양식'이라고 확대 · 번역하였다. 이 간구의 뜻을 더욱 확대한다면, 음식과 의복과 집〔衣食住〕 등 생필품을 주십사는 간구이다.
간구 5—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 직역하면 "저희에게 빚진 이들을 저희가 용서했듯이 저희 빚들을 용서하소서"이다. 여기서 빚은 죄를 가리키는 상징어이다. 예수가 사용한 아람어 '호바'는 빚과 죄 두 가지 뜻을 다 갖고 있다. 남의 죄를 용서해야만 자신의 죄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 예수는 거듭 역설하였다(마태 5,23-24; 마태 6,14-45=마르 11,25). 그렇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먼저 하느님의 지극한 용서를 체험해야만 남을 용서할 수 있는 도량이 생기는 법이다(마태 18,23-35). 그렇다면 다른 이의 죄를 무조건 용서해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예수는 남이 잘못을 뉘우칠 때 기꺼이 용서하라고 하였다(루가 17,3-4=마태 18,15.21-22).
간구 6—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 여기서 유혹은 많은 유혹들 중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일까? 주님의 기도는 제자들이 예수에게서 배워 매일 바친 기도라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그렇다면 여섯째 간구에서의 유혹은 제자됨을 저버리려는 유혹, 곧 추종을 포기하려는 유혹이다. 하느님에 관한 간구들과 관련하여 풀이한다면, 하느님 없이 살려는 자족 자만의 유혹이다. 또 넷째 간구와 관련한다면, 혼자 먹으려는 독식(獨食)의 유혹이나 식탐(食貪)의 유혹일 수 있다. 아울러 다섯째 간구와 관련하여 이해한다면, 하느님과의 화해 · 이웃과의 화해를 거부하는 불목(不睦)의 유혹이기도 하다.
간구 7—악에서 구하소서 : 이 간구는 마태오 복음사가의 가필이다. 일곱째 간구에 나오는 명사를 남성(πονηρός)으로 보면 "악한 자에게서 구하소서"가 된다. 이 경우 '악한 자'는 사탄을 가리킨다(13,19.38). 그러나 중성(πονηρόν)으로 보면 "악에서 구하소서"가 된다. 이 중 "악한 자에게서 구하소서"라는 번역이 더 좋다. 여섯째 간구와 일곱째 간구는 한 짝이다. 여섯째 간구의 '유혹'은 '악한 자', 곧 사탄이 사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 미〕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의 이름 · 하느님의 나라 · 하느님의 뜻을 두고 비는 세 개의 '하느님 간구'와 우리의 양식 · 우리의 죄 · 우리가 사탄에게서 받는 유혹을 두고 비는 네 개의 '우리 간구'로 되어 있다. 이 기본 구조만 보아도 기도문의 기본 취지가 잘 드러난다. 자비로운 하느님의 돌보심 아래서 나날이 우리의 삶을 꾸려 가도록 해 달라고 비는 것이다.
예수와 그 제자들은 당시의 묵시 문학적 시대 사조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하느님의 나라가 곧 도래하리라고 믿고 이 기도를 바쳤다. 이 기도의 사상적 배경은 종말 임박 신앙이었다. 그들이 지녔던 종말 임박 신앙이 말세를 외치는 광신자들 사이에 요즘도 재현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묵시 문학적 발상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곤란하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묵시 문학적 독소를 제거하면서 이 기도문을 바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옳겠는가? 하느님은 자애로운 아빠이고 우리는 그 품 안에 안겨 사는 아기들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아빠가 당신 이름과 나라와 뜻을 펴십사고 우선 간구한다. 그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간구한다. 우선 먹거리를 청하고 용서받고 용서하고 또다시 용서받음으로써 하느님 아빠와 화해하고 이웃과 화해하는 삶을 누리고 싶다고 말씀드린다. 이어서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라고 간구한다. 추종을 포기하라는 악마의 유혹, 하느님 없이 살라는 악마의 유혹, 먹거리를 독식 · 과식하라는 악마의 유혹, 불목하라고 부추기는 악마의 유혹을 이기는 힘을 주십사고 빈다.
예수의 설교 요지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인간의 회개이다. 그리고 회개의 핵심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의 나라와 인간의 회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 카데쉬)
※ 참고문헌 P. Grelot, La quatrième demande du Pater et son arrièreplan sémitique, 《NTS》 25, 1978 · 1979, pp. 299~314/ J. Starcky, La quatrième demande du Pater, 《HTR》 64, 1971, pp. 401~409/ J.A. Fitzmyer,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II, Anchor Bible, Garden City, 1985, pp. 900~905/ U. Luz, Das Evangelium nach Matthäus 1, Zurich, 1985, pp. 345~347/ R.E. Brown, The Pater Noster as an eschatological prayer, New Testament Essays, Milwaukee, 1965, pp. 217~253/ J. Jeremias, 박상래 역, 《주님의 기도》, 분도출판사, 1973/ J. Gnilka, Das Matthäusevangelium I, Freiburg, 1986, pp. 222~224/ 최혜영, 《하느님 내 입시울을 열어 주소서—신약성서의 기도문 연구》, 우리신학연구소, 1999/ 김덕기, 〈주기도문에서의 종말론과 윤리I-II), 《말씀과 교회》 23~24, 한국기독교장로회 신학연구소, 1999~2000/ 김명수, 〈주님의 기도〉, 《말씀과 교회》 23, 한국기독교장로회 신학연구소, 1999/ 김창락, 〈주기도문 번역 문제〉, 《성경 원문 연구》 8호(2001.2), 대한성서공회/ 나채운, 〈주기도문의 번역상의 문제점〉, 《성경 원문 연구》 8호(2001.2), 대한성서공회/ 민영진, 〈현대의 번역 이론에서 본 주기도 번역의 문제〉, 《성경 원문 연구》 8호(2001.2), 대한성서공회/ 조훈택, 〈주님의 기도를 새롭게 번역하며〉, 《성경 원문 연구》 8호(2001.2), 대한성서공회, 2001.2. 〔鄭良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