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자니아

〔영〕 Tanz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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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대륙 동부 인도양에 면한 국가로, 공식 명칭은 탄자니아 연합 공화국(United Republic of Tanzania). 1964년 동아프리카 대륙에 있는 탕가니카(Tanganyika)와 잔지바르(Zanzibar)가 합병하여 성립된 국가로, 북쪽으로 케냐 · 우간다, 남쪽으로 말라위 · 모잠비크, 서쪽으로 르완다 · 부룬디 · 콩고 민주 공화국 · 잠비아와 접하고 있다. 면적은 945,087㎢, 인구는 35,970,000명(2003)이며, 수도는 다르에스살람(Dar es Salaam)이다. 공용어는 영어와 스와힐리어이며, 국교는 없으나 전 국민의 약 40%가 이슬람교, 29%가 가톨릭, 20%가 토속 신앙을 믿고 있다.
1~1000년 전반의 어느 시기부터 철기를 사용하는 소수 집단의 사람들과 반투어를 쓰는 종족들이 서아프리카에서 현재의 탄자니아 지역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1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아라비아 반도와 동아프리카 해안 지방 사이에 무역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인도와도 무역 접촉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해안의 무역 중심지들은 주로 아랍인 정착지들이었다. 15세기 말경 포르투갈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이후 해안 지방에서의 아랍인의 영향력은 점차 약화되었지만, 포르투갈인들은 내륙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시도를 거의 하지 않았다. 아라비아의 무역상들은 노예를 찾아 끊임없이 내륙으로 깊숙이 침투하였는데, 그들의 주요 내륙 침투로는 니아사(Nyasa) 호를 향한 남서쪽 경로였다. 아랍 상인들은 1825년경 토착 부족들의 교역로를 따라 노예 못지않게 값진 상아가 있는 니암웨지(Nyamwezi)로 들어갔다. 1840년대 초 아랍인들은 니암웨지로부터 탕가니카 호까지 전진하여 교역소들을 설치하였다. 독일의 식민지 개척자들이 1885년 이 지역에 도착하였으며, 1907년 이 지역은 완전히 독일의 영향권 내에 편입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중에 영국이 독일 점유지들을 점령하였고, 전쟁이 끝난 후 국제 연맹의 위임을 받아 이 지역을 신탁 통치하게 되었다.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후에도 이 지역을 국제 연합(UN) 신탁 통치령으로 계속 지배하였다.
탕가니카는 1961년 12월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국제 연합에 가입하였고, 1년 후 니에레레(J.K. Nyerere, 1922~1999)를 초대 대통령으로 하는 공화국이 되었지만 계속해서 영국 연방 내에 잔류하였다. 1964년 잔지바르와 합병하여 국명을 탄자니아로 변경하였고, 니에레레 대통령은 아프리카식 사회주의 정책인 우자마(Ujama) 정책을 실시함으로써 분배의 평등을 강조하는 경제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이 정책은 자급 농업 경제, 비효율적이며 중앙 집권화된 관료 제도, 산업의 지나친 국유화, 그리고 농촌 우자마 마을로의 집단 농장화 등의 문제점을 야기하며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에 니에레레 대통령은 1985년 공식적으로 사회주의의 실패를 선언하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탄자니아는 1992년 다당제를 도입한 뒤, 1995년 10월 다당제하의 민주 총선을 치루어 집권 여당인 탄자니아 혁명당(CCM)이 다수 의석을 차지하면서 점차 정세 안정 기반을 확보하였다.
〔가톨릭의 역사〕 탄자니아에 대한 첫 번째 가톨릭 복음 전파는 1499년 잔지바르에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0~1514) 일행들과 함께 도착한 포르투갈의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선교사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들의 선교는 아랍 무슬림들의 반대로 인해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1698년에 끝났다. 두 번째 복음 전파는 19세기에 성령 수도회, 아프리카 성모의 선교사회(백의의 선교사회), 그리고 베네딕도회 등에 의해 이루어졌다. 호르너(A. Horner) 신부의 지도하에 있던 성령 수도회는 1863년 잔지바르에 처음으로 도착하여 5년 후 탄자니아의 본토인 바가모요(Bagamoyo)로 건너갔다. 선교사들은 이 마을에서 아랍 노예 상인들로부터 잡혀온 노예들을 해방시켜 주었으며, 그들에게 가톨릭 교리를 가르치는 훈련을 시켰다. 이때 해방된 노예들은 이후 첫 번째 선교사들이 되었다.
리비나크(Livinhac) 신부가 이끈 아프리카 성모의 선교사회는 두 그룹으로 나뉘어 1878년 탄자니아에 도착하였다. 한 그룹은 탕가니카 호수 근처에서 선교를 시작하였고, 다른 한 그룹은 빅토리아 호수 인근에서 선교를 시작하여 르완다 · 부룬디 · 우간다 · 동부 자이르(현 콩고 민주 공화국)와 함께 서부 탄자니아 모든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펼쳤다. 또한 이 선교회는 1904년에 처음으로 부코바(Bukoba) 지역의 루비아(Rubya)에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1917년 탄자니아 북서부의 부코바와 므완자(Mwanza) 지역에서 첫 번째 탄자니아 출신 흑인 신부 4명이 서품을 받았고, 1952년 부코바에서 루감브와(L. Rugambwa)가 최초의 탄자니아 현지인 주교로 서품되었는데, 그는 1960년 아프리카인 최초의 추기경이 되었다.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연합회는 1887년 다르에스살람에 진출하여 루부마(Ruvuma) 강 남부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펼쳤다. 또한 오틸리엔 연합회의 은단다(Ndanda) · 페라미호(Peramiho) 관구는 탄자니아 남부 지방을 문명화 · 근대화시키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1902년 11월에 잔지바르 대목구가, 1906년 8월에 다르에스살람 대목구가 각각 설정되었으며, 1953년 탄자니아에 교계 제도가 마련되면서 다르에스살람과 타보라(Tabora) 대교구가 설정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의 결과 성서와 성가가 스와힐리어로 번역되었고, 아프리카의 전통 악기들이 미사에 사용되어 많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미사에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또한 교회는 효율적인 사목 활동을 위해 소규모 가톨릭 공동체 시스템을 도입하여, 가톨릭 가족들은 약 12~20명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공동체로 나누어졌다. 이들 공동체들은 지도자들과 함께 가장 기본이 되는 교회가 되었고, 그곳에서 미사와 사회 활동 등을 펼쳤다. 탄자니아의 가톨릭 교회는 사회 사업, 특히 교육과 보건 분야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68년 교회는 1,378개의 초등학교, 44개의 중등학교, 8개의 사범대학, 25개의 병원, 75개의 진료실 등을 운영하였다. 그러나 1970년에 모든 초 · 중등학교와 사범대학이 공립화되어 교회는 다시 새로운 학교들을 설립하기 시작하였다. 가톨릭 교회의 이러한 활발한 활동은 이슬람 지도자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진행되었으나, 일부 지역에서는 이슬람 원리주의와 이슬람 법률 의무의 증대 때문에 2000년까지 두 종교 사이의 긴장감이 고조되었으며 2000년 4월에는 잔지바르의 이슬람 우세 지역에 위치한 성당에서 불이 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2003년 현재 탄자니아의 가톨릭 신자수는 10,326,000명이며, 대교구 5, 교구 25, 본당 813개에, 추기경 1, 대주교 5, 주교 33, 신부 2,080(교구 소속 1,382, 수도회 소속 698) 수사 653, 수녀 7,105명이 있다.
※ 참고문헌  D.W. Robinson, 《NCE》 13, 2003, pp. 755~766/ 2004 Catholic Almanac, Our Sunday Visitor Publishing Division, p. 324. 〔徐相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