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개혁 시기의 대사 설교가. 도미니코회 수사.
테첼은 1465년경 독일 작센(Sachsen) 주에 속한 마이센(Meissen) 인근의 피르나(Pirna)에서 태어났다. 라이프치히에서 공부를 하다가 1480년경 그곳에 있는 도미니코회에 입회하여 대학 수업을 받았고, 1487년에는 학사 학위(Baccalaureus atrium)를 취득하였다. 1502년에 글로가우(Glogau)의 수도원 원장이 되었으며, 이어 작센의 이단 심문관, 라이프치히의 설교가 그리고 수도원의 교사 생활을 하였다. 1504~1510년까지 발트 해 동쪽 해안에 있는 리보니아(Livonia)에 진출한 독일 수도회를 위해 대사 설교가로 활동하였으며, 1509년부터는 폴란드와 작센의 이단 심문관이 되었다.
테첼은 1516년부터 로마의 베드로 대성전 건축을 위한 대사(大赦) 설교를 본격적으로 하였다. 우선 마이센 교구를 담당하였고, 1517년부터는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의 후작이며 마인츠(Mainz) 대교구장인 알브레히트(Albrecht, 1490~1545) 대주교의 위임을 받아 할버슈타트(Halberstadt)와 마크데부르크(Magdeburg)의 수도원에서 교회의 입장을 대변하는 대사 설교를 총괄적으로 담당하였다. 그가 대사 설교와 관련하여 많은 지역에서 활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여행 기록을 모두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대사 설교를 위해 아이슬레벤(Eisleben), 할레(Halle), 마크데부르크와 베를린 등 독일 동부의 여러 곳을 돌아다녔음이 확인되고 있다. 하지만 비텐베르크(Wittenberg)에서는 작센의 선제후(選帝侯) 프리드리히 3세(1464~1525)가 대사 설교를 금지하였기 때문에, 인근 지역에서만 설교를 할 수 있었다. 테첼의 적극적이고 활력에 넘치는 대사 설교 활동은 인정을 받았고, 교황 레오 10세(1513~1521)는 1518년에 그에게 신학 박사 학위(Dr. theol.)를 주었다. 그러나 그의 대사 설교 활동은 1517년 비텐베르크에서 대사 설교를 반대하는 루터(M. Luther, 1483~1546)의 <95개조 명제> 작성과 발표를 촉진하게 만들었다. 테첼은 루터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대사의 정당성과 자신의 주장을 옹호하는 글을 작성하였다. 이 글은 실상 신학자인 빔피나(K. Wimpina)가 작성한 것이지만, 1518년 5월에 테첼의 이름으로 루터의 주장을 반박하는 122개 명제로 발표되었다. 그는 이후에도 계속 대사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많은 글을 작성하였다.
1518년 말 라이프치히의 도미니코회 수도원에 은거하기 시작한 테첼은 1519년 8월 11일 그곳에서 흑사병에 전염되어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대사 ; 루터 ; 종교 개혁 ; 치릴로, 알렉산드리아의)
※ 참고문헌 C.M. Atherne, 《NCE》 13, 2003, pp. 839~840/ Valentin Gnöne, Tetzel und Luther, Soest 1860²/ Ferdinand Körner, Tetzel, der Ablassprediger, Frankenberg, 1880/ Nikolaus Paulus, 《Katholik》 81, 1901, pp. 453~468, 554~570/ Herbert Smolinsky, 《LThK》 9, 2000, pp. 1359~1360/ J. Jürgen Seidel, 《BBKL》 11, 1996, pp. 725~726/ Gustav Adolf Benrath, Abla, 《TRE》 1, pp. 347~364/ I. Ludophy, 《RGG》 6, 1962, p. 704. [吳敏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