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노의 성의

— 聖衣

〔라〕 Sacra Sindon · 〔영〕 shroud of Turin, Holy shroud · 〔이〕 Santa Sind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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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앞면을 찍은 네거티브 사진. 남자의 모습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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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앞면을 찍은 네거티브 사진. 남자의 모습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예수의 시신을 감쌌던 것으로 여겨지는 수의(壽衣). 이탈리아 토리노(Torino) 교구의 성 요한 주교좌 성당에 있으며, '토리노의 수의' 혹은 '성수의'(聖壽衣)라고도 한다.
〔형 태〕 이 성의는 1898년부터 일반인에게 공개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해에 어떤 아마추어 사진작가가 성의를 카메라로 찍어 인화하자, 육안으로 보이지 않던 사람의 형태(죽은 남자의 앞뒤 모습)가 발견되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성의에 있는 인물이 예수라는 추측이 확산되었다. 1931년 다른 전문 사진 작가가 찍은 사진에도 사람의 얼굴이 드러나면서 토리노의 성의는 불가사의한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하였다.
이 천은 정확하게 3대1의 비율을 지키며 짠 능직(綾織, twill weave)으로 전체가 오늬 무늬로 되어 있는데, 가로는 109cm이고 세로는 436cm이다. 이 천에는 세로 길이의 한쪽 면을 따라 약 8.9cm의 린넨 천 조각으로 몇 군데를 기워 놓았다. 이 수의에는 흐릿한 모습이지만 양손을 모은, 약간 갈색이 도는 노란색을 띤 벌거벗은 남자 몸의 앞면과 뒷면이 새겨져 있다. 특히 나체의 전신상 모습, 오른쪽 눈꺼풀이 찢어진 모습, 팔목의 못 자국, 늑골 5번째와 6번째 사이가 창에 찔린 상처, 심지어 채찍 자국까지 보인다. 보이는 형태대로라면, 이 남자의 키는 약 180cm에 몸무게는 77kg으로 추정되며 턱수염이 있다. 이런 이유로 이 천은 십자가 처형을 받은 예수의 상징이 되었으며, 나아가 예수의 몸이 부활하는 과정에서 신비의 물질이 아마포에 흔적으로 남았다는 주장을 통해서 부활의 상징이 되었다. 이 천이 실제로 예수의 수의라면, 시신은 길게 깔아 놓은 이 천의 절반에 놓여졌을 것이고, 나머지 절반의 천으로 시신의 머리부터 시신의 상위 부분을 지나 발까지 덮어 시신을 완전히 감쌌을 것으로 생각된다.
〔성서에서의 언급〕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몸을 감싼 수의에 대한 첫 번째 언급은 요한 복음서에 있다(19,40). 예수의 몸을 감쌌던 것은 고운 베로 짜여진 아마포로 여겨진다. 예수의 시신을 거둔 사람은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으로, 그는 유대인의 풍습에 따라 시신에 향료를 바르고 고운 베로 싼 다음 동산에 있는 무덤에 안치하였다. 사흘 뒤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무덤을 찾아갔을 때, 입구를 막아 두었던 바위가 밀쳐져 있었다. 시신은 온데간데없고 수의만 가지런히 접혀 동굴 속에 남아 있었다(20,6-7). 토리노의 성의에는 많은 상처와 타박상들 그리고 이와 연관된 핏자국들이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상처들은 복음에서 기술된 십자가 위에 못박힌 예수의 상처들과 상당히 일치된다. 예를 들어 성의에 새겨진 남자의 왼쪽 손바닥—오른쪽 손목은 왼손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과 양발에서 피가 흐른 자국이 남아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남자의 오른쪽 갈비뼈가 있는 곳에 큰 상처 자국이 있고 여기서 많은 피가 흘러내린 흔적이 있다(19,31-37). 뿐만 아니라 그의 머리 주변에는 많은 상처 자국들이 보이고 이 상처가 난 곳에서 피가 조금씩 흘러내린 흔적이 남아 있다.
이는 마태오 복음사가가 가시관을 쓴 예수에 대하여 기술한 내용과 아주 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일치된다(27,29). 또한 온몸의 앞뒷면이 성한 데가 없이 상처로 뒤덮인 것과 어깨 위에서 아래로 내려간 상처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 로마 병사들로부터 매를 맞았다는 복음 내용과 일치한다(27,26). 복음서에서 언급된 예수의 수난과 이 수의에 찍힌 남자의 상처가 남긴 자국들이 많은 점에서 일치하기에, 학자들은 이 수의가 예수의 시신을 실제로 감쌌던 수의이거나 아니면 후대에 이를 매우 정교하게 그려낸 모사품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역 사〕 예수의 수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해져 올 뿐이다. 예수의 수의는 십자군 전쟁 당시에 터키에서 발견되어 프랑스로 옮겨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후 여러 단계를 거쳐 1578년부터 토리노 주교좌 성당으로 옮겨 보관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토리노의 성의에 대하여 14세기 중엽까지는 확실하게 고증이 되지만, 그 이상의 시대로 소급되면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현재 확인되는 확실한 자료는 1357년경에 이 성의가 프랑스 북동부의 트루아(Troyes) 인근의 리레(Lirey)에서 전시되었다는 사실이다. 파리의 클뤼니 박물관(Musée de Cluny)에는 이때 성의를 보기 위해 순례 온 이들을 그려 넣은 큰 메달을 보관하고 있다. 그 후 이 성의는 조프루아 드 샤르니(Geoffroy de Charny)와 그의 아내 잔(Jeanne de Vergy)의 소유가 되었다가, 1460년 사보이 왕가로 소유권이 양도되었다. 사보이 왕가에서는 이 성의를 은으로 만든 성물함에 넣어 프랑스 샹베리(Chambéry)에 있는 가문 소유의 성당에 보관하였다. 그러나 1532년 이 지역에서 발생한 연속적인 화재로, 성물함을 보관한 성당까지 화염에 휩싸였다. 사람들이 불길을 무릅쓰고 성당으로 들어가 성물함을 꺼내 왔지만, 불길에 녹아내린 은이 접어놓은 성의를 뚫고 들어가 성의가 불에 탔다. 이때의 불로 상당 부분이 불에 그슬렸고 또 불을 끄기 위해 물을 부었기에 이로 인한 손상 역시 컸다. 그래서 손상된 부분을 복구하고 불에 타서 없어진 부분을 다시 깁는 등 2년 동안 보수를 하였다. 1578년 사보이 왕가는 이 성의를 프랑스의 샹베리에서 토리노의 주교좌 성당에 있는 왕실 경당으로 옮겼고, 현재까지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 1983년 이 성의의 법적 소유권은 사보이 왕가에서 교황청으로 이관되었다.
〔진위 논쟁〕 역사에서의 논쟁 : 이 수의의 진위에 대해 교회는 대체적으로 입장 표명을 유보한다. 1357년 샤르니 가문이 리레에서 이 수의를 공개하였을 때, 당시 이 지역을 관할하던 트루아 교구장 앙리(Henri de Poitiers) 주교는 이 수의가 가짜라고 주장하면서 전시를 강력히 반대하였다. 1389년에 트루아 교구장인 피에르(Pierre d'Arcis) 주교는 아비뇽의 대립 교황 글레멘스 7세(1378~1394)에게 이 수의에 관한 편지를 보냈다. 그는 이 편지에서 전임 주교가 지녔던 생각에 상당히 공감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피에르 주교가 이 수의는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manufactus)으로 "사람이 그린 미술 작품이나 소묘 작품"(artificialiter depictus)이라고 말하였기에, 글레멘스 7세는 이 수의의 공개 전시를 중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후 교황은 상당히 신중한 태도를 취하면서, 이 수의가 전시될 때에는 이를 위한 전례 예식이나 장엄한 행렬 등을 하지 말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하라고 명령하였다. 즉 이 수의가 전시될 때에는 매번 사제가 참석한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속임수를 쓰지 말고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똑똑한 목소리로, "이 전시물(수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무덤에 모실 때 사용하였던 진짜 수의(sudarium)가 아니고, 단지 수의 형태로 또는 그 수의를 묘사하기 위하여(in figuram seu representationem) 만들어진 미술 작품이나 사실화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말을 반드시 하도록 명령하였다.
그 후 교회 지도자들은 이 수의에 대하여 보다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어 1578년 밀라노의 보로메오(Carolus Borromaeus, 1538~1584) 대주교는 이 수의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밀라노에서 토리노까지 걸어갔었다. 그렇지만 이 수의의 진위에 대한 언급은 회피하였다. 1670년 교황청은 이 수의를 보러 가서 그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대사를 내린다고 반포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단서 조항을 공지함으로써 진위 논쟁에 대해서는 비켜가는 신중함을 보였다. 즉 "이 수의를 보기 위해 온 사람들은 이 수의를 경배해서는 안 되고, 단지 이 수의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받은 수난의 고통을 묵상해야 하며, 이 주의 사항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한하여 대사를 내린다"라고 한 것이다.
연대 측정에 따른 논쟁 : 1988년 토리노 교구의 안토니오 발레스테로(Antonio Ballestero) 추기경은 성의에 대한 여러 가지 논쟁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이 수의의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을 허락하였다. 애리조나 대학교와 옥스퍼드 대학교의 투스콘 연구소, 취리히 연방 과학 연구소 등 3개의 독립 연구소에서 방사성 동위 원소에 의한 연대 측정을 시도한 결과 수의는 1260~1390년 사이의 것으로 여겨지며 그 정확성에 대한 신뢰도는 95%라고 밝혔다.
그러나 토리노의 성의 제작 연대와 관련된 논란을 매듭지으려고 시도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과 그 결과는 오히려 새로운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성의가 진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강한 의문을 표시하였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 수의가 1532년에 불탔기 때문에 그 천에 탄소 동위 원소가 정상적인 것에 비하여 많아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이 수의의 섬유 조직에 박테리아와 곰팡이들이 생겨났기 때문에, 이를 이용한 연대 측정은 부정확하다는 것이다. 논쟁이 가열되자 많은 과학자들이 탄소를 이용한 연대 측정은 새로운 기술이 아니라는 것에 동의하였고, 또한 이 분석에 사용된 방법이 적절하였는가, 오염 물질을 처리하는 방법은 적절하였는가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많다는 것에 상당 부분 동의하였다.
피의 흔적에 대한 논쟁 : 진위 논쟁에서 가장 큰 문제는 성의의 피의 흔적이 사람의 피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1978년 10월 수의가 공개 전시된 현장 가까운 곳에서 과학자들이 조사한 결과, 피의 흔적에서 알부민(albumin)과 포르피린(porphyrin) 계열의 물질 그리고 철(iron) 성분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이 흔적은 진짜 사람의 피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한 이 수의에서 화가들이 붓을 댄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것과, 이 수의에 나타난 시신의 모습이나 피의 흔적들이 그림으로 그려진 것이라고 주장할 만한 직접적이고 확고한 증거를 찾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일부 학자들이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들은 철 성분은 화가들의 물감에도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2000년 전 피라고 보기에는 너무 이상한 붉은 색의 흔적에 대하여도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런데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든 사실이 발표되었다. 외양으로는 선명하고 더렵혀지지 않은 이 흔적들은 피가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린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예수가 십자가에 수직으로 매달렸을 때 그가 받은 무수한 상처들에서 나온 피가 흘렀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수의에 싸여 무덤에 묻혔을 때에는 피가 흐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 문제이다. 이 수의가 진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수의 친구들이 십자가 위에서 죽은 예수의 손과 발에서 못을 빼내어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린 다음, 얼마나 떨어진 거리에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무덤으로 가서 그곳에서 수의로 시신을 감쌌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하지만 이때 그들이 시신에 흐른 피를 닦아내고 피가 더이상 흐르지 않도록 조처를 취하지도 않고 그냥 시신을 수의로 감쌌을 리는 없다. 그렇기에 수의의 진정성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의 시신은 먼저 물로 씻겨진 다음 수의로 감싸여졌을 것이다. 따라서 이 수의는 돌아가신 예수의 상처들에서 미세하게 흐른 피를 묻힌 채로 보존되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핏자국이 수의에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기타 논쟁 : 화가가 죽은 예수의 모습을 수의에 그렸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지만, 그랬을 가능성은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수의에 나타난 형태가 시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수의로 사용한 천 중 예수의 시신에 가까이 있었던 부분이나 시신에 직접 닿은 부분에서는 그 윤곽이 선명하게 드러나야 하고 시신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부분에서는 덜 분명하게 드러나야 한다. 실제로 남자의 손이나 그의 눈 주변에 움푹 들어간 부분을 포함한 얼굴 부분은 그 모습이 아주 선명하게 드러난 반면 둔부나 배꼽이 있는 부분의 모습은 아주 흐릿하게 나타나 있거나 아니면 보이지 않는다. 조심스럽게 이 문제에 접근하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은 선명한 부분과 흐릿한 부분의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수의에 나타난 남자의 오른손과 오른팔이 정상적인 경우보다 더 길게 나타나는 이유는 예수의 시신에서 드러난 성기 부분을 사람들이 그의 오른손으로 조심스럽게 가리게 하였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는 정상적인 시신으로는 만들 수 없는 형태이다. 그리고 이 천이 정말로 예수의 시신을 감싼 것이라면, 천을 펼쳐 놓았을 때 예수의 모습이 불규칙하게 나타나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문제의 천에 나타난 예수의 모습에는 주름잡힌 부분도 없고 불규칙하게 뒤틀린 부분도 없다. 마지막으로 여기에 나타난 남자의 모습이 신앙심 깊은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던 경건한 예수의 모습 그대로라는 것이다. 이 모습은 비잔틴 시대의 성화에 나타난 모습이지만, 로마의 카타콤바(Catacomb)에 나타난 초기의 그림에서 보면 예수는 수염이 없는 남자로 묘사되어 있다. 또 복음에서는 예수의 신체적 모습이나 특징 등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점들 때문에 토리노의 성의가 과연 예수 시대의 것인지 혹은 그 후대의 것인지에 대해 학자들 사이에서 여전히 많은 논란이 있다.
〔전 망〕 학자들의 논쟁과는 별도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토리노의 성의를 예수의 수의로 믿고 있다. 이들은 신앙과 관련된 부분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모두 밝힐 수는 없다고 말한다. 대희년을 맞아 2000년 8월에 공개된 토리노의 성의는 사람들에게 경이로움과 신비로움을 안겨 주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토리노의 성의를 통해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적 요소인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신앙을 더욱 굳건히 키워가고 있다.
토리노의 성의와 관련된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은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을 의뢰하였던 토리노 교구의 발레스테로 추기경이 1988년에 발표한 공문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결론들에 대한 평가는 과학에 맡겨 두면서, 교회는 언제나 성의와 관련하여 표명되어 온 자세를 지키는 신자들의 신심 대상으로 남아 있는 그리스도의 이 존경스러운 성상에 대한 존중과 공경을 확인한다. 즉 (성의에 나타난) 그 형상의 가치가 수의 자체의 연대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다. 또한 동시에 그 형상의 기원과 보존에 관한 문제들은 아직도 대부분 미해결인 채로 남아 있으며, 계속적인 조사와 연구를 필요로 할 것이다."
※ 참고문헌  Scientific findings on the age of the Shroud of Turin, L'Osservatore Romano, Weekly Edition, N. 42(1988.10.17)/ I. Wilson, The Mysterious Shroud, Garden City, Doubleday, 1986/ ──, The Blood and Shroud, The Free Press, 1998/ R.A. Wild, 《NCE》 13, pp. 95~97. 〔鄭雄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