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정부에서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의 전말을 중국에 보고한 문서. 1801년 10월(음) 대제학 이만수(李晚秀)가 작성하였으며, 10월 27일(음)에 파견된 동지겸 진주사(冬至兼陳奏使) 조윤대(曹允大)에 의해 중국 조정에 전달되었다.
<토사주문>이 작성된 배경은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의 체포와 <백서>(帛書)의 발견에서 찾을 수 있다. 1801년 1월 10일(음) 대왕대비 정순왕후(貞純王后) 김 씨의 천주교 금지령이 내려지면서 신유박해가 시작되었고, 서울에 있던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는 황해도 황주(黃州)로 피신하였다가 3월 12일(양력 4월 24일) 의금부에 자수하였다. 조선 정부에서는 주문모 신부를 신문하는 과정에서 그가 중국인임을 알게 되어 그를 중국으로 보낼 것인지 아니면 처형할 것인지를 논의하게 되었는데, 결국 중국으로 이송하지 않기로 결정함에 따라 주문모 신부는 4월 19일(양력 5월 31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그런데 9월 29일(음) 황사영이 체포되면서 <백서>가 발견되었고, 그 내용에는 조선 정부가 중국인인 주문모 신부를 처형한 사실이 들어 있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혹시 이 내용이 중국에 알려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신유박해의 내용과 주문모 신부를 처형하게 된 과정을 중국 정부에 보고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만수에게 <토사주문>을 짓게 하고, 10월 27일(음) 동지겸 진주사 조윤대를 청국에 파견하여 <토사주문>과 <백서>를 대폭 축소한 <가백서>(假帛書)를 제출토록 하였다.
이러한 배경하에 작성된 <토사주문>은 조선 정부의 천주교 탄압이 정당한 행동이었음을 설명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즉 유교의 삼강오륜을 근본 이념으로 삼고 있는 조선에 천주교가 들어와 조상 제사를 폐지하는 등 인륜을 어지럽혔고, 천당과 지옥이 있다는 말로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이는 폐해가 컸다고 전제한 뒤, 황건적(黃巾賊) · 백련교(白蓮敎)와 같은 무리들이 각지에서 치성(熾盛)함에 따라 이들을 엄금함은 물론, 주동자인 주문모 신부 ·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 · 강완숙(姜完淑, 골롬바) · 황사영 등을 처형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아울러 이러한 조치에 대해 역변(逆變)의 무리를 신속하게 소탕하여 위태로웠던 국세(國勢)를 다시 편안하게 만들었다고 평가한 조선 정부는, 혹시 중국으로 몰래 도피한 천주교도들을 발견하면 붙잡아 돌려보내 줄 것을 중국 조정에 요청하였다. 또 주문모 신부에 대해서는 그가 처음부터 의복 · 언어 · 모습이 조선 사람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사당(邪黨)의 괴수로만 인정하고 조선의 형벌을 시행하였는데, 황사영이 체포되고 그를 공초하는 와중에 주문모 신부가 중국인이라는 말이 나옴에 따라 제후의 법도를 지키는 도리로서 중국에 보고한다고 하였다. (→ <가백서> ; <백서> ; 신유박해 ; 주문모)
※ 참고문헌 《순조실록》/ 《가톨릭 사전》. 〔方相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