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회

痛悔

〔라〕 contrtio · 〔영〕 contr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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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참회를 가리키는 신학 용어.
일반적인 의미에서 통회는 "지은 죄에 대한 마음의 고통이며,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그 죄를 미워하는"(DS 1676) 덕(德)의 행위이다. 초기 그리스도교 문헌에서는 통회라는 용어가 드물게 발견되나, 회개나 양심의 가책(compunctio) 등의 용어들이 같은 의미를 전 해 준다. 실제로 성서학이나 신학에서 회개와 통회는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통회는 고해성사의 구성 요소로서 참회하는 사람의 세 가지 행위(통회, 고백, 보속) 가운데 가장 중요한 행위이며, 상등 통회(上等痛悔)와 하등 통회(下等痛悔)로 구분할 수 있다.
〔일반적 의미〕 참회 또는 하느님을 아프게 하였음에 대한 진정한 후회는 일반적으로 과거의 범죄 행위를 기억하고 현재의 죄 상태를 자각하는 인식 요소와, 죄의 현존을 슬퍼하고 죄를 끊겠다는 결심으로 죄를 미워하는 의지적 요소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죄의 참회를 뜻하는 통회란, 단순히 죄를 인식하고 뉘우치는 것만이 아니라 지은 죄를 슬퍼하며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지은 죄를 인식하고 뉘우치는 행위는, 만약 죄를 미워하고 멀리하였다면 범하지 않았을 과거의 죄를 이제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연결된다. 죄를 슬퍼하고 미워하는 이유는 죄를 지음으로써 하느님과의 관계가 깨졌기 때문이며, 이 마음의 고통은 반드시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의지를 동반한다.
상등 통회와 하등 통회의 구분은 통회하는 이의 참회 행위, 즉 회개의 강도에 따른 것이 아니라 참회의 형상적 동기에 따른 구분이다. 하등 통회와 구분되는 특정한 의미에서의 통회, 즉 상등 통회는 하느님에 대한 참된 사랑이 참회의 동기가 되어 하느님을 모든 것 위에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완전한(perfecta) 통회'를 말한다. 다시 말해 통회하는 이의 행위가 완전한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회개의 동기인 사랑이 완전한 동기이기 때문에 완전한 통회인 것이다. 반면 하등 통회는 참회가 신앙의 다른 동기, 즉 죄의 추악함이나 지옥 또는 하느님이 내리실 벌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것을 말한다.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사랑으로 완전해지지 않은 '불완전한(imperfecta) 통회'를 의미한다. 그래서 완전한 통회를 '사랑의 통회'(caritatis contritio)라 하고, 불완전한 통회를 '두려움의 통회'(contritio ex timore)라 한다.
〔구분과 논쟁의 역사〕 상등 통회와 하등 통회의 정식화(定式化)는 적어도 12세기 전까지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구분이 성서나 교부들의 저술에서 전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구약성서에서 예언자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불충실한 회개를 질책하고(호세 6,1-4), 신약성서에서 세례자 요한은 두려움에 의한 참회에서 진정한 참회로 나아가라고 설교하며(마태 3,7-12), 탕자의 비유는 자기 연민에서 효과적인 참회로 발전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루가 15,17-19). 교부들 가운데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Hipponensis, 354~430)는 의지를 낡은 의지와 새 의지, 육적인 의지와 영적인 의지로 구분하여 불완전한 통회의 특성을 설명하였으며(《고백록》 8-9), 교황 그레고리오 1세(590~604)는 두려움에 감화된 양심의 가책과 사랑으로 감화된 양심의 가책에 대해 말하였다(In Ezech. hom. 2. 10. 30f; 《PL》 76: 1070).
8~12세기 초까지 스콜라학파 이전의 학자들과 초기 스콜라학자들은 오직 한 가지 죄의 슬픔에 대해 언급하며, 그것을 고해성사와의 관계 안에서 통회라고 불렀다. 그들은 이 통회를 죄의 고백과 사제의 사죄(赦罪) 이전에 죄를 씻어내는 행위로 여겼으며, 사죄는 이미 사해진 것을 교회가 사제를 통해 단순히 선언하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죄의 슬픔을 이끌어내는 통회의 준비 단계들은 아직 고려되지 않았고, 11세기 말경에 이르러 일반적으로 점진적인 준비가 그와 같은 통회를 이끈다고 생각하였다. 예를 들면, 두려움은 죄인을 진정한 참회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상등 통회주의 : '하등 통회'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기존의 통회를 특정한 의미의 상등 통회로 구별하고 양자의 차이를 처음으로 명확하게 언급한 사람은 알라노(Alanus de Insulis, 1116/1120?~1202)였다. 그는 죄에 대한 불쾌감을 표현하기 위해 하등 통회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으나, 이 상태가 죄인에게 개선에의 확고한 목적을 불어넣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불완전하게 참회하는 사람들은 "덜 악하게는 되지만 완전하게 통회할 때까지 악한 행업을 그만두지 못한다"(Regulae de sacra theologia, 85; 《PL》 210 : 665). 죄인은 오직 죄에서 완전히 돌아서는 상등 통회에 의해서만 용서된다.
통회에 대한 이러한 구분은 13세기 중반에 이르러 공통적인 가르침이 되었다. 예를 들면 굴리엘모(Guilielmus Arvernus, 1190?~1249)는 하등 통회에 대해 보다 긍정적인 접근을 시도하면서, 상등 통회와 하등 통회의 차이를 사랑에 의해 형성되었느냐 아니냐에 두고 설명하였다. 그는 하등 통회를 죄의 제거를 향한 첫 단계로 여겼다. 하등 통회로 죄의 파괴가 시작되고, 상등 통회를 통해 그 과정이 완전해진다. 하등 통회는 고해성사를 위한 준비이며, 죄인은 고해성사를 통해 그 안에서 상등 통회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그의 구분은 보나벤투라(Bonaventura, 1217?~1274)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25~1274)를 비롯한 13세기의 위대한 스콜라학자들의 공통된 특성이었다. 이처럼 13세기에는 상등 통회와 하 등 통회를 두려움이나 사랑의 동기가 아니라 사랑에 의해 형성되었느냐 아니냐, 죄와의 결별이 완전하냐 불완전하냐의 여부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상등 통회를 고해성사 안에서든 밖에서든 의화(義化)를 위한 배치(配置, dispositio)로 간주하였다. 이 배치가 참회자에게 결여되었을 때, 성사는 은총을 베풀기 전에 참회자로 하여금 상등 통회의 태도를 갖게 할 것이다. 따라서 은총의 단계에서 죄에 대한 모든 초자연적 참회는 상등 통회만 있을 뿐, 하등 통회는 없다. 이것이 중세의 '상등 통회주의'(contritionism)이다.
하등 통회주의 : 상등 통회와 하등 통회에 대한 또 다른 개념과 신학은 스코투스(J.D. Scotus, 1265/1266~1308)에게서 나왔다. 그는 하등 통회가 성사 안에서 의화를 위한 충분한 배치라는 사상을 처음으로 개진하였다. 비록 하등 통회의 참회자가 성사 안에서 상등 통회를 한다고 하더라도, 불완전한 슬픔이 완전한 슬픔의 행위에 자리를 내주는 것이 아니라 하등 통회의 행위는 그대로 남아 있다는 의미로 이해한 것이다. 즉 죄의 사함을 얻기에 모자람이 있는 하등 통회의 참회자는 성사 안에서 성사의 은총이 그 부족함을 보충해 줌으로써 죄의 용서를 얻지만, 하등 통회의 태도는 의화된 뒤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보다 결정적인 일보는 상등 통회와 하등 통회의 구분 요인으로 동기(動機)를 주장한 오컴(W. of Ockham, 1285~1349) 등 유명론자(唯名論者)들의 사상에 있었다. 근본적으로 새로운 이 개념에 따르면, 상등 통회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동기이고 하등 통회는 형벌의 두려움이 그 동기이다. 따라서 상등 통회와 하등 통회는 더이상 죄와의 완전하거나 불완전한 결별에 의해 구분되거나 사랑에 의한 형성이냐 아니냐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나 두려움이라는 심리적 동기에 의해 구분되었다. 하등 통회는 본질적으로 상등 통회를 향한 과정의 일부가 아니며, 성사는 하등 통회의 참회자를 상등 통회의 상태로 만들지 않는다. 또한 사죄와 의화는 참회의 동기를 변화시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죄에 대한 슬픔을 유발시키는 동기들이 서로 유기적인 연속성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사 밖에서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사랑하는 완전한 통회가 요구되지만, 성사 안에서는 형벌의 두려움에 의한 불완전한 통회로도 충분하다. 이러한 중세의 새로운 신학인 '하등 통회주의'(attritionism)는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 이전 스콜라학파 시대에 크게 일어났다.
트리엔트 공의회와 이후의 논쟁 : 가톨릭 내부의 이 논쟁에 대해 트리엔트 공의회는 한쪽의 입장을 편들기보다, 하등 통회가 인간을 위선자요 커다란 죄인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한 루터(M. Luther, 1483~1546)와 프로테스탄트의 관점을 반대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그래서 상등 통회와 하등 통회의 구분을 가톨릭 교리로 인정하는 한편, 두 학파의 관점을 모두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를 취하였다.
공의회는 하등 통회를 하느님의 선물이요 성령께서 일으켜 주시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왜냐하면 "이 통회는 죄의 추악함이나 지옥과 형벌에 대한 두려움에서 생기기" 때문이다(DS 1678). 그와 같은 하등 통회는 참회의 성사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죄인을 의화시키지 못하고, 다만 "죄인이 성사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얻게 해 준다"(DS 1678). 반면 상등 통회에 대해서는 두 학파가 주장한 대로 그것을 사랑에 의한 완전한 참회라고 가르치되, 반드시 성사에 대한 원의를 포함하여야만 죄의 용서를 받고 의화된다고 하였다. 또한 공의회는 하등 통회에서 상등 통회로의 변화를 주장하거나 배척하지도 않았다. 공의회는 상등 통회를 의화를 위한 배치라고 간주하는 한편, 하등 통회는 죄를 저지르려는 의지를 배제하고 용서의 희망을 포함하여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성사 안에서 "충분한 하등 통회"가 되지 못한다고 지적하였다(DS 1678).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특히 17세기에 주된 논쟁의 초점으로 등장한 것은 두려움의 동기에서 비롯된 하등 통회에 관한 것이었다. 이 논쟁에서 하등 통회주의자와 상등 통회주의자의 입장은 각각 공의회 이전의 입장과는 달랐다. 두 학파는 모두 심리적 동기의 접근법을 따랐으며, 트리엔트 공의회의 가르침을 하등 통회도 성사 안에서 의화에 충분하다는 의미로 이해하였다. 두 학파의 차이는 충분한 하등 통회를 위해 필요한 동기에 있었다. 상등 통회주의자들은 충분한 하등 통회를 위해 두려움의 동기가 아닌 사랑의 동기를 요구하였으나, 하등 통회주의자들은 굳이 이 사랑의 동기를 요구하지 않았다. 부언하면 17세기의 상등 통회주의자들은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이 좋고 유익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마태 10,28 참조), 두려움의 동기에서 생긴 하등 통회가 고해성사 안에서 용서를 얻기 위한 충분한 준비라는 점을 부인하였다. 그들에 따르면, 두려움의 동기에서 생긴 하등 통회는 죄인이 고해성사 안에서 용서의 은총을 얻도록 영향을 주기는 하지만 하느님을 향한 사랑만큼 직접적이지 않다. 반면 하등 통회주의자들은 두려움의 동기에서 생긴 하등 통회가 하느님의 용서에 대한 희망과 결합된다면, 고해성사를 통해 그 안에서 용서를 얻기에 충분하다고 주장하였다. 두 학파의 논쟁은 특히 얀센주의(Jansenismus)의 본고장인 벨기에에서 가열되었으나, 1667년 5월 5일 교황 알렉산데르 7세(1655~1667)가 상호 비난을 엄격히 금지하는 교령(DS 2070)을 반포한 이후 평화롭게 공존해 왔다.
〔사목적 이해〕 통회는 무엇보다 자신에 대한 겸허한 인식에서 비롯된다. 모든 죄는 교만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통회는 바로 이 교만을 꺾고 하느님 앞에 겸손하게 서는 순간 우러나온다. 그러므로 통회는 수동적인 양심의 가책이 아니라 신앙의 동기에서 양심의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유로운 행위이며, 완전한 통회든 불완전한 통회든 그 동기는 초자연적이다. 사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시오"(마태 10,28)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경고처럼 두려움은 모든 회개의 첫걸음이며, 두려움에 의해 생긴 슬픔도 사랑에 의해 형성될 수 있다. 하등 통회는 반드시 범죄 의지를 배제하고 용서의 희망을 포함하여야 하며, 현대 신학은 이것을 믿음, 희망,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와 같은 의미를 함축한 '충분한 하등 통회'라면, 그것은 토마스적 의미의 상등 통회와 표현상의 차이만 있을 뿐 사실상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실천적인 측면에서 통회의 동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죄를 끊어 버리겠다는 굳은 결심이다. 이것은 과거에 대한 슬픔보다 개선의 목적에서 더 잘 나타난다. 죄에 대해 슬퍼하고 후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굳은 결심 없이는 결코 죄를 용서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확고한 개선의 의지가 뒤따른다면 통회하는 영혼의 고통은 진실한 것이다. 통회는 나쁜 결과에 대한 단순한 후회가 아니라 마음과 생각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하며, 죄를 멀리하고 하느님께로 돌아서겠다는 회개의 결심이다. 따라서 굳건한 의지가 수반 되어야 한다. (⇦ 상등 통회 ; 하등 통회 ; → 고해성사 ; 통회의 기도 ; 회개)
※ 참고문헌  P. de Letter, 《NCE》 4, pp. 278~283/ G.A. Gilleman, Contritionism, 《NCE》 4, p. 283/ P.F. Palmer, Attrition and Attritionism, 《NCE》 1, pp. 1032~1033/ 주교 회의 교리 교육위원회 역, 《가톨릭 교회 교리서》 1451~1454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3/ K.H. 페쉬케, 김창훈 역, 《그리스도교 윤리학 제1권: 基礎倫理神學》, 분도출판사, 1998, pp. 428~444/ 프란쯔 뵈클레, 성염 역, 《基礎倫理神學》, 분도출판사, 1993, pp. 154~167/ R. 로울러 · D. 우얼 · T. 로울러 편저, 오경환 역, 《그리스도의 가르침》, 성바오로출판사, 1981, pp. 498~511/ 대건신학대학 전망 편집부, 《가톨릭 신앙 입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71, pp. 544~554/ 까롤로 커란, <오늘의 고백성사 Ⅱ>, 《사목》 14(1970.8),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pp. 16~33/ 유봉준, <화해와 참회의 성사>, 《사목》 88(1983.7), pp. 24~31. 〔李 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