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르뇌, 빅토르 루이 (1880~1944)

Tourneux, Victor Lou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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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 본당 주임 시절의 투르뇌 신부(뒷줄 왼쪽부터 세 번째, 1912년 대구).

낙산 본당 주임 시절의 투르뇌 신부(뒷줄 왼쪽부터 세 번째, 1912년 대구).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세례명은 빅토르. 한국명은 여동선(呂東宣). 1879년 9월 14일 프랑스 로제(Rougé)에서 태어났으며, 1901년 9월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03년 6월 21일 루케트(C.P. Rouquette) 신부와 함께 서품을 받고, 8월 5일 프랑스를 떠나 10월 8일 한국에 도착하였다.
1904년 4월 무안 우적동 본당에 부임한 투르뇌 신부는 보다 적당한 지역으로 본당을 이전할 계획으로 1906년 8월 노안면 용산리 남산 소재 부지 4,545평을 매입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6월 남산으로 거처를 옮기고 본당 설립을 추진하였으나, 부락 유림들의 반대와 부지 소유자의 계약 파기로 인하여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게 되었다. 마침 법성의 신자가 집을 한 채 희사하자 투르뇌 신부는 법성으로 숙소를 옮기고 다시 본당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희사받은 집 또한 소유권 분쟁에 휘말리게 되어 계량으로 돌아와 1908년 계량 공소를 계량(현 노안) 본당으로 승격시켰다. 이듬해 5월 목포(현 산정동) 본당 2대 주임으로 부임하였고, 이어 1912년 5월에는 가실(현 낙산) 본당 5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1944년 3월 지병으로 사망하기 직전까지 이곳 신자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한편 1918~1919년에는 수류 본당 4대 주임 페네(C. Peynet, 裵嘉錄) 신부가 징집됨에 따라 수류 본당 관할 지역을 임시로 사목하기도 하였다.
투르뇌 신부는 1922년 점촌동 본당과 퇴강 본당의 설립으로 신자수가 감소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1923년 신자들과 함께 성당과 사제관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 9월 완공하고 봉헌식 및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이와 함께 관할 왜관 공소의 승격을 계획하여 1928년 2월부터 시작된 성당 공사의 공사비 일부를 지원하였고, 자주 공사 현장을 방문하면서 공사를 직접 감독하였다. 1929년 세 번째 자본당으로 왜관 본당이 설립되자 가실 본당의 교세는 위축되었다. 이에 드망즈(F. Demange, 安世華) 주교는 1933년 가실 본당을 노사제들을 위한 휴양 본당으로 설정하였다. 1936년부터 투르뇌 신부는 치료차 귀국한 베르트랑(J. Bertrand, 韓聖年) 신부를 대신하여 자주 교구 재정 일을 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1943년 2월 지병으로 은퇴하여 주교관에서 휴양하던 중 1944년 3월 20일 사망하였다. (⇦ 여동선 ; → 낙산 본당 ; 노안 본당 ; 산정동 본당 ; 왜관 본당)
※ 참고문헌  《뮈텔 주교 일기》 3 · 4 · 5 ‧ 6, 한국교회사연구소/ 《드망즈 주교 일기》/ 천주교 광주대교구, 《광주대교구 50년사》, 1990/ 천주교 대구대교구사 편찬위원회 편, 《대구 본당 백년사》, 대건출판사, 1986/ Répertoire des membres de la société des missions ètrangéres 1659~2004, Archives des missions étrangères, Paris, 2004. 〔金善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