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니지

〔영〕 Tuni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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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북부 지중해 연안에 있는 국가로, 공식 명칭은 튀니지 공화국(Republic of Tunisia). 북쪽과 동쪽은 지중해에 면하고, 서쪽은 알제리, 남동쪽은 리비아와 접하고 있다. 면적은 163,610k㎡, 인구는 2003년 현재 9,888,000명이며, 수도는 튀니스(Tunis)이다. 공용어는 아랍어이나 프랑스어도 널리 쓰이고 있으며, 국교는 이슬람교이다. 국민의 대부분은 아랍계와 베르베르계의 혼혈로, 현재 튀니지인들의 대부분은 아랍인의 후손이고, 베르베르인(Berber)의 문화는 흔적만 남아 현재 베르베르인은 전체 인구의 2%에 불과하다.
튀니지는 지중해의 요지라는 지리적인 요건 때문에 과거부터 많은 나라의 침략을 받아 왔다. 고대부터 페니키아 · 로마 제국 · 반달족(Vandal) ·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7세기에는 아랍인의 침략으로 원주민 베르베르인들이 차츰 아랍 · 이슬람화되어 갔다. 그리고 중세에는 마그레브(Maghreb) · 무라비트(Murabit) · 하프스 왕조가 흥망하며 아랍 · 이슬람화가 심화되었다. 16세기 중엽 오스만 제국의 속령이 되어 튀니지를 다스리는 파샤(Pasha, 태수)가 임명되었다. 튀니지는 아바스 왕조(Abbasid dynasty, 750~969)와 그 조공국인 아글라브 왕조(Aghlabid dynasty, 800~909) · 시아파의 파티마 왕조(Fāṭimid dynasty, 909~1171) · 알모아데(Almohade, 1130~1269) · 하프스 왕조(Ḥafṣid dynasty, 13~16세기) · 스페인 등의 통치자들에게 거듭 침략을 당하였으며, 마침내 1574년 오스만 제국에 복속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통치는 19세기 말까지 계속되었지만, 제국의 국력이 쇠퇴하면서 튀니지는 프랑스 · 이탈리아 · 영국의 세력 각축장이 되었다. 그러나 한동안 이 3개국 사이의 상충하는 이해 관계는 오히려 튀니지의 자치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1881년 협상에 따라 영국은 키프로스를 차지하고, 프랑스는 튀니지를 보호령으로 삼게 되었다.
프랑스 은행가와 기업가들은 대농원 경영과 광산 개발 등을 통해 튀니지의 경제권을 장악하여 큰 이익을 올렸다. 그러나 주권 회복을 원하는 튀니지인들의 민족 운동은 20세기에 들어와 더욱 격렬해지며 1907년 결성된 청년 튀니지당(Jeunes Tunisiens)에 의하여 차별 항의가 시작되었다. 그들은 비록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중에 프랑스를 지원하기는 하였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는 다시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1920년에 이르러 데스투르당(Destour)은 튀니지인의 동등한 참정권을 요구하였고, 1930년대에는 부르기바(H. Bourguiba, 1903~2000)를 지도자로 하는 신(新)테스투르당(Neo-Destour)이 등장하여 프랑스 인민 전선 정부의 지지를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중에 해산하였던 이 정당은 전후(戰後)에 다시 결성되어 독립 운동을 이끌었다. 1956년 3월 프랑스는 튀니지에 완전 독립을 부여하였으며, 튀니지의 독립 운동가였던 부르기바를 행정 수반으로 한 독립 튀니지가 국제 연합(UN)에 가입하였다. 파샤들의 통치가 폐지되고 공화국이 선포되었으며, 1964년 신데스투르당은 데스투르 사회당(Parti Socialiste Destourien, PSD)이 되었다. 1980년대 초 정부는 정당 활동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정책에 착수하였고, 노동 조합 활동으로 구속되었던 노동 조합원들이 특별 사면을 받았으며, 튀니지 공산당이 합법화되었다. 1981년 사상 최초의 다수당 경선 국회 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그 결과 기존의 국민 전선(데스투르 사회당과 노동 조합의 하나인 튀니지 노동 총연맹〔UGTT〕의 연합 전선)이 압승을 거두었다. 1987년 11월 벤 알리(S.E.A. ben Ali) 총리가 무혈 쿠데타에 성공하여 부르기바를 해임하고 새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취임 후 그는 점진적으로 지역 산업을 자유화하고, 해외 무역을 권장하며, 국가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가톨릭의 역사〕 튀니지에서 가톨릭은 로마의 지배를 받은 이후 번성하였다. 5세기에 카르타고(Carthago) 교구에 아우렐리오(Aurelius) 주교가, 533년에는 루스페 지역에 풀젠시오(Fulgentius, 467?~533) 주교가 파견되어 활발한 선교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648년 이후 이 지역에 침입한 아랍 이슬람의 정복으로 그리스도교는 쇠퇴하였다. 서유럽 가톨릭 국가들의 십자군 원정 때에는 프랑스의 루이(루도비코) 성왕(1226~1270)이 튀니지를 정복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수도 튀니스를 포위하고 있는 동안 사망하였다. 이와 같이 튀니지는 7세기 이전까지는 로마의 속국으로 가톨릭의 영향을 받았으나 카르타고 왕국의 정복 시대가 지나고 7세기경부터 아랍인들에 의해 다스려지면서, 이후 8세기 반 동안 이슬람이 가톨릭을 대신하여 튀니지 사람들의 삶의 원천이 되었다. 12세기에 스페인이 이 지역을 지배 · 통치하게 되면서 다시 가톨릭이 번성하게 되었지만, 12세기 중엽 알모아데의 이슬람 지배로 넘어감으로써 다시 이슬람이 이 지역에서 우세하게 되었다. 이처럼 이 지역에는 가톨릭과 이슬람이 교차하여 서로 영향을 끼쳤으며, 1956년 튀니지가 독립한 이후에는 이슬람이 국교가 되었다.
이 지역에서는 15세기 오스만 제국의 정복 이후 그리스도교 노예들에 대한 박해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1816년 서구 국가들은 공식적으로 이 지역 국가들에 그리스도교 노예 사용의 금지를 요구하였고, 튀니지도 이를 수용하였다. 1843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1831~1846)는 튀니지 대목구를 설정하였고, 1884년 11월 튀니지 대목구는 카르타고 대교구로 승격되어 카르타고의 대주교이자 아프리카의 수석 대주교인 라비즈리(C.M.A. Lavigerie, 1825~1892) 추기경이 이 지역을 관할하게 되었다. 그는 무슬림들을 위하여 튀니지에 생 루이(St. Louis) 대학을 세우고, 자신이 설립한 아프리카 성모의 선교사회(백의의 선교사회)에 그 운영을 맡겼다. 튀지니 정부는 독립 이후 종교 단체의 설립은 허가하지 않았으나, 유일하게 가톨릭 단체의 설립만은 공식적으로 허가하였다. 하지만 1964년 6월 바티칸과 부르기바 대통령 사이의 협약으로 튀니지 내 교회의 상황은 급격하게 바뀌었다. 즉 카르타고 대교구가 없어지고 이 지역은 튀니스 성직 자치구로 격하되었으며, 카르타고 대성당이 박물관으로 바뀌는 등 대부분의 교회 건물들이 아무런 보상 없이 튀니지 정부에 넘겨진 것이다. 다만 교회가 운영하는 교육 기관과 의료 기관만이 존속할 수 있었다. 1995년 5월 다시 튀니스 교구가 설정되었고, 교회는 2000년까지 8개의 초등학교와 5개의 중등학교, 6개의 문화 센터 및 도서관, 1개의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한편 튀니지에는 많은 교회 건축물들이 남아 있다. 그 가운데 벨라토르(Bellator) 성당에는 15세기 초 튀니지에 살았던 주쿤도(Jucundus) 주교에 의해 장식된 경당 등이 있다. 또한 비탈리스(Vitalis) 성당은 2개의 첨탑을 가진 대성당으로, 모자이크 장식을 갖춘 세례소도 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계속되는 분쟁 등으로 많은 유적들이 파괴되고 있는 실정이다. 2003년 현재 튀니지의 가톨릭 신자수는 전체 인구의 0.02%인 22,000명이며, 교구 1개에, 대주교 1, 신부 30(교구 소속 11, 수도회 소속 19), 수사 7, 수녀 153명이 있다.
※ 참고문헌  Ashbee, Bible of Tunisia, London, 1889/ Broadley, Tunis Past and Present, London, 1882/ J. Cuoq, 《NCE》 14, 2003, pp. 236~237/ 2004 Catholic Almanac, Our Sunday Visitor Publishing Division, p. 325. 〔徐相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