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버, 호노리우스 (1894~1972)

Traber, Honor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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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도회 성 오틸리엔 연합회 소속 한국 선교사. 세례명과 수도명은 호노리오. 한국 성은 마(馬).
1894년 2월 8일에 로텐부르크(Rottenburg) 교구의 슈투트가르트(Stuttgart)에서 태어난 트라버는, 1913년 에힌겐(Ehingen)에서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튀빙겐(Tübingen) 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였다. 이듬해에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발발하자 장교로 참전하여 이탈리아 전선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나, 양쪽 다리에 골절상을 입어 일생 동안 고생하였다. 1919년 종전이 된 후 그는 튀빙겐 대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계속하다가 졸업을 앞둔 1921년 성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여 1년간 법정 수련을 받고 1922년 12월 12일 유기 서약을 하였다. 그리고 1923년 7월 26일 성 오틸리엔 수도원의 뮌헨 소재 신학원인 오틸리엔콜레크(Ottilienkolleg)에서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 교구의 레트(Carl Reth) 보좌 주교 주례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후 그는 1928년까지 성 오틸리엔 수도원의 딜링겐(Dillingen) 소신학교와 뮌스터슈바르자흐(Münsterschwarzach) 수도원의 성 루트비히(St. Ludwig) 소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28년 5월 27일 한국 선교사로 임명된 그는 7월 17일 덕원 수도원에 도착하여 한국어를 익히다가 10월 말 연길 지목구 육도포 본당의 보좌로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고, 1929년에 주임이던 되르플러(E. Dörfler, 鄭, 1898~1986) 신부가 떠나자 주임 신부가 되어 1935년까지 사목하였다. 그는 성당을 증축하고 해성학교를 설립하는 등 본당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자신이 철저하게 사는 것처럼 신자들도 철저하게 신앙 생활을 하도록 항상 강조하였다. 1932년 8월 13일 새벽 마적의 습격으로 본당이 파괴되자, 이때부터 훈춘 본당에 머물며 신자들을 돌보았다. 하지만 1934년 훈춘 성당과 사제관도 공산당의 습격으로 전소되었다. 그래서 트라버 신부는 지목구장인 브레허(T. Breher, 白化東, 1889~1950) 주교의 지시로 1935년 8월 연길 지목구 최북단의 신흥 도시인 목단강시(牧丹江市)를 방문하여 성당 부지를 물색하였다. 목단강시는 당시 철도의 중심지가 되면서 인구가 급격히 늘어난 대도시였다. 그곳에서 우연히 용정 본당 출신으로 일본 오사카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김 안나라는 신자를 만나 한인 신자 30여 명을 알게 되었는데, 이들이 본당 공동체 건설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해 9월 그는 목단강의 주임 신부로 부임하여 성당, 수녀원, 사제관, 교육관을 건립하고 12월 8일에 봉헌식과 축복식을 가졌다. 1936년에 신참(新站) 본당의 설립을 계획하게 되자, 브레허 주교는 목조 성당과 사제관의 건축을 트라버 신부에게 맡겼다. 그가 목단강의 성당을 건축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1936년 목단강 본당에는 한인 공동체, 중국인 공동체, 일본인 공동체가 공존하고 있었다. 1939년 10월 렌츠(P. Lenz, 延, 1892~1977) 신부가 보좌로 와서 중국인 공동체를 사목하다 연길로 돌아가고 후임으로 1941년 1월부터는 퓌터러(M. Fütterer, 郭, 1912~1998) 신부가 보좌로 와서 한국인 공동체를 돌보게 되면서 트라버 신부는 중국인 공동체를 주로 돌보았다. 그는 4월 15일 중국인 신자들을 위해 목단강시에 두 번째 본당인 '목단강 본당'(중국인 성당)을 지어 10월 15일 봉헌식을 가졌다. 그러나 1945년 8월 4일 소련군들이 목단강 본당에 와서 공동체를 해산시키고 트라버 신부를 체포하였으며, 스파이로 오인받은 그는 시베리아 포로스킬로프(Woroschilow)로 끌려갔다가 그해 성탄 즈음에 풀려났다. 하지만 1946년 5월 이후 남평 수용소에 감금되어 있다가 1949년 1월 완전히 풀려나 본당 반환을 위해 목단강으로 갔으나, 본당은 이미 중국의 공산당 위원회가 사용하고 있었다. 더이상 연길에서의 선교 활동이 불가능해 그는, 1949년 12월 철수 1진에 포함되어 연길, 홍콩, 유럽을 거쳐 1950년 4월 7일 성 오틸리엔 수도원으로 귀환하였다. 그리고 1951년 이래 성 오틸리엔 수도원 분원인 베소브룬(Wessobrunn)에 머물며, 한국 선교사로 다시 파견될 희망을 갖고 평소 작업 중이던 한국어 교리서 편찬 작업에 몰두하였으나 이 교리서는 빛을 보지 못하였다. 그는 1972년 2월 16일 선종하였으며, 성 오틸리엔 수도원 묘지에 묻혔다. (→ 목단강 본당 ; 연길교구 ; 육도포 본당)
※ 참고문헌  A. Kasper · P. Berger, HWAN GAB(還甲), Münsterschwarzach, 1973/ D. Drexl OSB, Necrologium congregationis Ottiliensis 1888~2000, St. Ottilien/ Erzabtei St. Ottilien, Schematismus 1924~1946, St. Ottilien/ Todesanzeige von Abtei St. Ottilien, 1972/ Chroniken aus den Mission, Der Benediktiner-Missionär von St. Ottilien, Sonderausdruck aus der Benediktiner-Kongregation von St. Ottilien, Tatsachenbericht aus dem Missionsgebiet Yenki(Mandschurei) Nr. 3, 1954/ 부산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도 수녀원 60년사 편찬위원회 편, 《은혜의 60년》, 부산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1995/ 주성도, 《주성도 신부 자서전》, 분도출판사, 1993/ 韓興烈, 〈延吉教區 天主教略史>, 《가톨릭청년》 41호(1936.10). 〔宣智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