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치아노 베첼리오 (1488/1490~1576)

Tiziano Vecell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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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관한 알레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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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관한 알레고리>.

16세기의 이탈리아 베네치아파 화가.
〔생애와 작품〕 티치아노는 현재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지역인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북부 피에베 디 카도레(Pieve di Cadore)라는 알프스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인 그레고리오 디 콘테 데이 베첼리(Gregorio di Conte dei Vecelli)와 루치아(Lucia)는 겸손한 재력가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초기—벨리니와 조르조네의 영향 : 1498년경 티치아노와 그의 형 프란체스코(Francesco)는 베네치아로 가서 모자이크 화가인 추카토(S. Zuccato)의 공방에서 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티치아노는 곧 추카토를 떠나 젠틸레 벨리니(Gentile Bellini, 1429?~1507)와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1430?~1516) 형제의 작업장에서 그림 공부를 시작하였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지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자코포 페사로를 베드로 성인에게 소개함>(1502~1512)은 조반니 벨리니의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1507년부터 티치아노는 조르조네(Giorgione)라고도 불린 조르조 다 카스텔프랑코(Giorgio da Castelfranco, 1477?~1510)의 작업장에서 그가 죽은 1510년까지 3년간 조수로 일하였다. 그와 같은 뛰어난 화가와 함께한 시간은 상당히 오랫동안 젊은 티치아노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티치아노가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조르조의 것으로 여겨지거나 혹은 그 반대의 경우인 작품들도 있다. 이렇게 작가가 불분명한 작품 중 하나가 <전원의 합주>(1510?~1511)로, 어떤 자료에서는 여전히 이 작품이 조르조의 작품으로 기록되어 있다. 티치아노의 작품 중 조르조의 영향이 묻어나는 것으로는 <아도니스의 탄생>(1505~1510), <폴리도로스의 전설>(1505~1510), <성 마르코가 성인들의 존경을 받음>(1510?), <합주>(1510?), <놀리 메 탕게레>(1511~1512), <집시 마돈나>(1512?)와 <성스러운 사랑과 세속적인 사랑〉(1514) 등과 같은 대작도 있다.
1510년 티치아노는 파도바의 안토니오(Antonius Patavii, 1195~1231)의 세 가지 기적을 주제로 한 프레스코화를 제작해 달라는 주문을 시작으로 독립적으로 주문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베네치아의 화가로 자리잡게 되었다. 1513년에 그는 자신의 작업장을 열고 두 명의 조수를 고용하게 되는데, 그중 한 사람은 조반니 벨리니의 작업장에서 일하던 사람이었다. 1516년 티치아노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성당인 베네치아의 산타 마리아 글로리오사 데이 프라리(Santa Maria Gloriosa dei Frari)의 주 제단을 위한 새로운 작품을 주문받았다. 그래서 제작된 작품이 <성모 승천>(1516~1518)인데, 이 제단화는 베네치아 전성기 르네상스의 지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티치아노를 베네치아 최고의 화가로 만들어 주었다. 또한 벨리니 가문의 오랜 후원자로 북부 이탈리아를 통치하는 페라라 공작 알폰소 1세(1476~1534)의 주목을 받게 되어, 신화를 주제로 한 <비너스 예찬>(1518), <바쿠스와 아리아드네>(1520~1522) <아드리아 사람들의 주신제>(1523~1525)라는 세 점의 작품을 제작하였다.
1519년 티치아노는 또 다른 기념비적 작품인 <페사로 제단화>(1519~1526) 및 <어린 그리스도와 성 프란치스코와 알비세 그리고 봉헌자 알비세 고치(Alvise Gozzi)와 함께 있는 영광의 성모>(1520)를 제작하는데, 이 작품은 미래의 기준이 된다. 이 시기의 또 다른 대작으로 <순교자 베드로의 죽음>이 있는데, 이 작품은 소실되었다. 1523년에 티치아노는 만토바 공작인 곤차가 가문(Gonzaga dynasty)의 페데리코 2세(Federico Ⅱ, 1500~1540)를 만나 <페데리코 2세의 초상화>(1523~1529) 및 <성 가타리나와 토끼와 함께 있는 성모자(聖母子)>(1530) 같은 종교화를 제작하였으며, 그의 소개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1519~1556)를 만났다.
중기—초상화가로서의 명성 : 1520~1540년대에 티치아노는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가 되었다. 현존하는 작품 중 손꼽히는 것으로는 <몰타의 기사>(1510?~1515), <모자와 장갑을 낀 젊은 남자>(1512?~1515), <장갑을 낀 남자>(1520?~1522), <토마소(Tomasso)의 초상>(1526?), <바스토의 후작, 알폰소 다발로스>(Alfonso d'Avalos, Marques del Vasto, 1533), <이폴리토 데 메디치(Ippolyto de'Medici)의 초상>(1533), <라 벨라>(La Bella, 1536), <우르비노의 공작,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라 로베레(Francesco Maria della Rovere)의 초상>(1536?~1538), <젊은 영국 남자>(1540?~1545), <추기경 피에트로 벰보(Pietro Bembo)의 초상화>(1540?), <음악가의 초상>(1515? 또는 1544?~1546), <소녀의 초상>(1545?) 등이 있다.
1533년 티치아노는 카를 5세의 궁정 화가로 임명되고, 팔라틴 백작위를 받았다. 그리고 카를 5세의 초상화를 여러 점 그렸는데, 황제는 티치아노가 떨어뜨린 붓을 집어 줄 정도로 그에게 경의를 표하였다고 한다. <카를 5세의 초상>(1533), <뮐베르크에서의 황제 카를 5세의 초상>(1548), <앉아 있는 황제 카를 5세의 초상>(1548) 등의 작품이 있으며, 황제의 가족 초상화도 제작하였다. 황후를 그린 <포르투갈의 이사벨>(1548)과, 카를 5세의 아들이자 후에 스페인의 왕이 되는 펠리페 2세(1556~1598)를 그린 <갑옷을 입은 펠리페 2세의 초상>(1550?~1551), <펠리페 2세의 초상>(1554?) 등이다.
1538년에 티치아노는 또 다른 걸작을 제작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우르비노(Urbino)의 비너스>이다. 이 작품은 그가 그린 이상적인 여성 누드화 중 하나로, 조르조의 <잠자는 비너스>(1510)를 재해석한 것으로 평가된다. 여성을 모델로 한 티치아노의 그림 중 또 다른 유명한 작품들로는 <플로라>(1515?~1520), <살로메>(Salome, 1515?) <비너스 아나디오메네(anadyomene)>(1520?), <오르간 연주자와 함께 있는 비너스와 큐피드>(1548?), <유모와 다나에>(1553~1554), <비너스와 아도니스>(1553~1554) , <파르도 비너스>(1535~1540)와 <마리아 막달레나>(1530?~1535) 등이 있다.
티치아노는 파르마 공국을 다스린(1545~1731) 파르네세 가문 출신인 교황 바오로 3세(1534~1549)에게서도 여러 주문을 받았다. 그중에서 <교황 바오로 3세와 그의 손자 오타비오(Ottavio)와 추기경 알레산드로 파르네세(Alessandro Farnese)〉(1545~1546)가 유명한데, 이 작품은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후기—색채의 대가 : 1550년대 후반에 티치아노는 회화에서 무엇보다 색채의 탐구에 가치를 두었다. 그의 양식과 기량은 정확한 윤곽과 모델링에서 시작하여, 초기의 초상화에서 매우 자유분방한 붓질의 자유로운 양식을 보여 줌으로써 보다 대담한 마무리를 시도하였다. 그는 물감을 점점 대담하게 사용하였고, 색점을 사용하여 마치 모자이크와 같은 효과를 만들어냈다. 후에 인상주의자들은 그의 후기 작품을 가까이에서 보면 그림이 분명치 않으나, 적당한 거리를 두고 보면 밝은 색채를 띤다고 언급하였다. 이 같은 화려한 색채는 펠리페 2세를 위한 티치아노의 후기 신화 관련 작품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디아나와 칼리스토>(1556~1559), <디아나와 악타이온>(1556~1559), <에우로파의 겁탈>(1562), <눈 가린 큐피드와 비너스>(1565?)가 그것이다. 그의 후기 작품 중 주목할 만한 것은 <시간에 관한 알레고리>(1565?), <마리아 막달레나의 참회>(1565), <성 세바스티아노>(1575), <스페인의 도움을 받은 신앙>(1572~1575) 등이다. 티치아노는 1576년 8월 27일 베네치아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숨을 거두었고, 유해는 산타 마리아 글로리오사 데이 프라리 성당에 묻혔다.
〔의의 및 영향〕 티치아노는 긴 인생만큼 남긴 작품들 또한 다양하다. 무엇보다 그는 색채를 '나의 시(詩)'라고 칭할 만큼, 순수한 색채를 표현 수단으로 삼아 베네치아 회화의 풍요로운 색채주의의 절정을 이루었으며, 후대의 화가들에게 매우 다른 방식으로 다양한 영향을 주었다. 푸생(N. Poussin, 1594~1665), 루벤스(P.P. Rubens, 1577~1640), 반 데이크(A. van Dyck, 1599~1641), 렘브란트(Rembrandt, 1606~1669), 고야(F. de Goya, 1746~1828)는 물론 마네(É. Manet, 1832~1883)와 르누아르(P.-A. Renoir, 1841~1919)에 이르기까지 후대의 많은 화가들이 티치아노의 영향을 받았다. (→ 르네상스 ; 조르조 다 카스텔프랑코)
※ 참고문헌  David Rosand, Painting in sixteenth-century Venice: Titian, Veronese, Tintoretto, Cambridge · New York, Cambridge Univ. Press, 1997/ Filippo Pedrocco, Titian, New York, Rizzoli International Publications, 2001/ John Steer, Venetian Painting: A Concise History, London, Thames & Hudson, 1985/ Marion Kaminski, Tiziano Vecellio, known as Titian: 1488/1490~1576, Köln, Konemann, 1998. 〔鄭恩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