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놀 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주교. 초대 청주교구장. 세례명은 야고보. 한국명은 파지(巴智). 1898년 3월 미국 뉴욕 주 브루클린(Brooklyn)에서 출생하였다. 1918년 뉴욕 시립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메리놀회에 입회하여 1927년 뉴욕의 세인트 프랜시스 대학, 1930년 워싱턴 가톨릭대학원을 졸업하고 32세의 나이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서품된 뒤 메리놀 외방전교회 소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1932년 선교사로 한국에 입국하였다. 당시 평북 비현 본당의 보좌로 있던 레이(J. Ray, 李) 신부에게 한글을 배웠으며, 1934년에는 주일마다 핼로란(E. Halloran, 河) 신부가 사목하던 영유 본당을 도와 주기도 하였다. 같은 해 2월부터 1941년 12월까지는 평북 의주 본당의 8대 주임으로 재임하였는데 파디 신부는 특히 주일학교를 철저하게 운영하고 유치원과 양로원을 확충하며 해성학교를 정식 인가받아 운영하는 등 교육 사업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처럼 열성적으로 사목 활동을 하고 있던 중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일제에 의하여 체포되어 신의주에서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뒤, 1942년 6월 평양 대목구의 다른 메리놀회 선교사들과 함께 본국으로 강제 추방되었다. 그 후 미 육군에 입대하여 유럽에서 군종 신부로서 사목 활동을 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1946년 미국 메리놀회의 소신학교 교장, 1948년에는 메리놀회 본부의 교육감을 역임하였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군종 신부로 다시 한국에 입국하여 1953년까지 거제도와 마산의 포로 수용소 등에서 미군과 포로들을 위한 사목 활동을 폈다. 전쟁이 끝난 1953년 9월에는 메리놀회 한국 지부장 겸 충북 감목 대리로 임명되었다. 1956년에 메리놀회 부총장으로 선출되어 미국으로 돌아갔는데, 부총장으로 재임 중이던 1958년 6월 23일에 청주 대목구가 설정되어 7월 4일에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 이에 9월 16일 복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순교일에 미국 뉴욕 메리놀회 대신학교 성당에서 주교 축성식을 갖고, 그해 11월 21일 세 번째로 한국에 입국하여 25일 청주중학교 강당에서 착좌식을 가진 뒤 1969년 6월 교구장직을 사임할 때까지 청주교구의 사목과 행정을 총괄하면서 교세 신장에 주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부임 초 15개 본당에 신자수 18,600여 명이던 교세가 재임 11년 동안 22개 본당과 140여 개의 공소 그리고 신자수 48,893명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또한 매괴상업고등학교의 설립(1953)과 이후 매괴여자중 · 상업고등학교로의 발전(1966.11) 등을 위시한 교육 사업에도 큰 힘을 기울였다. 그 밖에 증평 · 청원의 보육원과 옥천의 양로원 및 진료소를 운영하는 등 사회 사업과 여러 가지 문화 사업에도 힘을 쏟으며 각 방면에서 청주교구 발전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1969년 6월 28일 72세의 고령으로 교구장직을 사임하고 청주 사천동 소재 양로원인 성심원 원장(1970.6~1975.4)으로 부임하여 불우한 노인들을 돌보다가 1976년 본국으로 귀국하여, 미국 캘리포니아의 메리놀회 본부 은퇴 신부 휴양소에서 생활하다가 1983년 2월 15일 85세에 심장 질환으로 선종하여 메리놀회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 군종교구 ; 메리놀 외방전교회 ; 청주교구 ; 평양교구)
※ 참고문헌 <가톨릭신문>/ 《경향잡지》/ 《가톨릭 사전》/ 《The Field Afar》/ 평양교구사 편찬위원회 편, 《천주교 평양교구사》, 1981/ 《천주교 청주교구 연감》, 천주교 청주교구청, 1995/ 군종교구사 편찬위원회, 《천주교 군종교구사(군사목 50년사)》, 천주교 군종교구, 2002. [崔先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