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지역의 선교를 목적으로 프랑스에서 최초로 교구 소속 신부들로 결성된 선교회.
〔설 립〕 파리 외방전교회의 설립은 1660년경의 여러 상황들과 맞물려 이루어졌다. 첫째는 프랑스, 특히 파리의 일부 교구 신부들과 평신도들, 그중에서도 성체회(Compagnie du Saint Sacrement)로 불리는 신심회의 성직자와 사도직 활동에 열성적인 회원들이 당시까지 수도회가 중심이었던 외방 선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열망을 갖게 된 것이다. 둘째, 베트남을 방문한 최초의 프랑스인 예수회 선교사 로드(A. de Rhodes, 1591~1660) 신부가 앞장서서 주장한 것으로, 현지인 성직자들의 양성을 촉진하기 위해 주교들을 아시아로 파견할 필요성을 인식한 것이다. 셋째, 포르투갈 정부에 의해 지배되던 선교지들의 실제적인 관할권을 되찾기 위해 1622년에 설립된 포교성(Congregatio de Propaganda Fide, 현 인류 복음화성)이 포르투갈 보호권(padroado)에 개입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특히 1646~1657년까지 10년에 걸친 성체회원들의 꾸준한 노력과 로마에서 이루어진 포교성 및 교황들과의 끈질긴 교섭으로 아시아 선교지에 주교들을 파견해 달라는 그들의 청원이 드디어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이에 교황 알레산데르 7세(1655~1667)는 1658년에 선교지에 파견할 주교들을 임명하였는데, 이 대목(代牧, vicarius apostolicus)들의 임명이 외방 전교회의 시초였다. 그들 중 캐나다 선교지의 주교로 임명된 라발(F. de Montmorency Laval, 1623~1708)을 제외한 팔뤼(F. Pallu, 1626~1684), 랑베르 드 라 모트(P. Lambert de la Motte, 1624~1679), 그리고 2년 후 추가로 임명된 코톨랭디(I. Cotolendi, 1630~1662) 등은 아시아 선교지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팔뤼는 통킹(Tonking) 대목으로 라오스(Laos)와 중국의 남서부 지방을, 랑베르 드 라 모트는 코친차이나(Cochinchina) 대목으로 중국의 남부 지방을, 코톨랭디는 남경(南京) 대목으로 중국의 중부와 북부는 물론 몽골과 조선까지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의 선교 책임을 맡게 되었다. 교황은 그들에게 현지인 성직자를 양성할 임무를 주고 지정받은 선교지를 포교성 직속 대목의 자격으로, 다시 말해 포르투갈의 보호권에서 완전히 독립된 자주적인 관할권으로 위임하였다.
랑베르 드 라 모트 주교는 1660년에 시암(Siam, 현 타이)으로, 코톨랭디 주교는 1661년에 중국으로, 팔뤼 주교는 외방 전교회의 장래를 보증할 준비를 끝낸 후 1662년에 랑베르 드 라 모트 주교가 앞서 간 시암으로 떠났다. 그들은 파리를 떠나기에 앞서 선교지에 파견할 후속 선교사의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설립하도록 지시하였고, 곧이어 파리에 설립된 이 신학교는 1663년 루이 14세(1643~1715)에 의해 승인되었으며, 1664년에는 교황청의 공인(公認)을 받았다. 이로써 아시아의 선교 발전에 새 시대를 열게 될 외방 전교회는 신학교의 설립과 더불어 더욱 확고한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발 전〕 선교사 수의 변화 : 1660년 2명의 동료 선교사를 동반한 랑베르 드 라 모트 주교의 출발을 기점으로 17세기 말까지 117명이 아시아로 출발하였다. 18세기 동안에는 196명, 19세기 전반에는 289명, 이어 20년 동안에는 482명으로 그 수가 점차 많아졌고, 1871~1910년까지의 40년 동안은 연평균 50명이 아시아로 출발함으로써 정점에 달하였다. 그러나 그 후인 1911~1920년에는 연평균 11명으로 그 수가 급격히 하락하였고, 1921년부터 20명 선을 회복하면서 1960년까지 40년간 연평균 22명 선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1961~2004년까지의 43년 동안은 156명으로 연평균 3.5명에 그치는 최저점을 기록하였다. 1871~1910년이 성소(聖召)의 황금 시대였다면 이후, 특히 1961~2004년은 성소의 최저 시대였다고 말할 수 있다.
외방 전교회의 선교 지역은 선교사 수의 증가에 따라 점차 확대되었다. 18세기 당시까지 인도차이나와 중국의 일부 지역에 국한되었던 선교지는 중국 및 인도의 남부로 확장되었고, 19세기에는 여러 나라가 추가되었다. 1831년에는 조선과 일본이, 1838년에는 만주, 1841년에는 말레이 반도, 1846년에는 티베트, 1848년에는 중국의 광동(廣東)과 광서성(廣西省), 1855년에는 버마, 1899년에는 말레이지아가 잇달아 위임됨으로써 선교 지역이 크게 확장되었다.
현지인 교구의 발전 : 외방 전교회는 '현지인 성직자 양성'이라는 주 목표에 따라 선교지에 신학교들을 설립하였다. 최초의 신학교는 1665년 시암 왕국의 수도에 세워졌지만 박해와 전쟁으로 여러 곳을 전전하다 1807년 말레이 반도의 페낭 섬으로 옮겨 정착하였다. 이후 이 신학교는 박해 때문에 신학교를 세울 수 없었던 조선, 일본, 중국, 베트남, 버마, 타이 등 아시아 10여 개 나라에서 파견된 신학생들을 성직자로 양성하면서 사실상 아시아 지역 전체의 신학교 역할을 하였다. 이 신학교와 외방 전교회에 위임된 대부분의 선교지 신학교에서 배출된 현지인 성직자 수는 1850년에 150명, 1900년에 612명, 1925년에 1,218명, 1940년에 3,800명에 달하였고, 20세기 후반에는 그 수가 더욱 증가하였다. 실제로 20세기는 현지인 성직자 양성 및 현지인 교구 발전의 시기였다. 현지인 성직자 수의 증가에 따라 현지인에게 이양된 교구도 점차 많아져 1922년에 중국 두 곳의 지목구장을 필두로 1923년에 인도인이, 1926년에는 6명의 중국인이, 1927년에는 일본인이 주교 서품을 받았다. 현지인에게의 교구 이양은 1990년에 이루어진 한국의 안동교구가 마지막이었다.
발전의 저해 : 혁명과 전쟁, 박해 그리고 공산주의와 민족주의는 외방 전교회의 발전을 저해(沮害)한 주요 요인이었다. 프랑스 대혁명(1787~1799)으로 파리 신학교는 1792년에 폐쇄되었고, 이 상황은 1805~1809년에 일시 회복되었다가 나폴레옹 1세(1804~1815)가 실각하는 1815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실권을 회복한 루이 18세(1814~1824)는 신학교를 다시 허가하였고, 1823년에는 모든 권리를 다시 인정하였다.
파리 외방전교회가 이룬 큰 성과에는 그만큼의 희생이 뒤따랐다. 약 200명의 선교사들이 박해로, 신앙을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바쳐야 하였다. 그중 23명이, 즉 1984년에 한국인 순교자들 가운데 10명, 1988년에 베트남 순교자들 가운데 10명, 2000년에는 중국인 순교자들 가운데 3명이 포함되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1950년 이후 중국의 공산화로 모든 선교사들이 추방되면서 선교지들이 폐쇄되고, 민족주의의 고양으로 버마,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지의 많은 선교사들이 살해되거나 추방되면서 선교지에서의 선교사들 체류와 활동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추방된 선교사들을 위해서 종래의 선교지 외에 중국인들의 사목을 위하여 대만과 마다가스카르(Madagascar), 모리셔스(Mauritius)와 인도네시아 등이 추가로 위임되었다.
〔회 칙〕 수도 서약을 한 사람과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입회가 허락되지 않고, 최종 입회는 선교지에서 3년 동안의 시험 기간를 거치고 일생을 외방 선교에 바친다는 서약을 한 후에 허락되었다. 외방 전교회는 1921년 이후 집단 체제에서 총장제로 바뀌었고, 1950년부터 파리에 주재하며 전체 책임을 맡는 임기 10년의 총장과 참사 2명 및 로마 주재 총대표를 총회에서 선출한다.
〔평가와 전망〕 교구 신부를 처음으로 외방 선교에 투입하고 또한 대목구라는 준교구 제도를 선교지에 적응시킨 계획으로, 파리 외방전교회는 아시아에서 포르투갈의 보호권을 몰아내고 아시아 선교의 선두에 서게 되었다. 그 외에도 현지인 성직자 양성의 길을 열고, 그들이 양성한 현지인 성직자에게 교구를 이양하며, 선교지에 교계 제도를 설립토록 한 점 등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설립 초기부터 현재(2004)까지 회원의 총수는 4,263명으로, 100여 개 교구를 직접 또는 다른 선교회나 현지인과 협조하여 건설하였으며, 현재 회원 수는 320명이다. 줄어드는 성소 때문에 앞으로의 계획에 어려움이 있겠으나, 최근에는 성소가 다소 회복되고 있다. 소수이긴 하지만 남은 회원들은 한국, 일본, 홍콩, 대만,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타이,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현지인 성직자들과 협조하면서 선교와 사목에 봉사하고 있다. 선교사들의 출발 기지였던 파리의 신학교는 현재 아시아 출신 유학 신부 및 학생들의 기숙사로 활용되고 있다.
〔한국에서의 활동〕 파리 외방전교회의 조선 진출은 교황 그레고리오 16세(1831~1846)가 1831년 9월 9일자 소칙서로 조선을 대목구로 설정하고, 파리 외방전교회의 회원인 브뤼기에르(B. Bruguière, 蘇) 주교를 조선의 초대 대목구장(1831~1835)으로 임명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의 조선 선교사 지원은 조선 대목구를 설정하여 그 선교지를 외방 전교회에 위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배경 : 중국과 일본에는 이미 16세기 중엽에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복음이 전해졌으나, 조선만은 철저한 쇄국주의 때문에 선교사들의 입국이 불가능하였다. 일본과 중국 선교사들이 조선에 복음을 전하려고 여러 차례 시도하였으나 그 또한 번번이 실패하였다. 그러는 동안 중국의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번역 또는 저술한 한역 서학서들이 북경을 거쳐 조선에 전해졌고, 이 서학서들에 대한 일부 유학자들의 호기심, 또는 구도심에서의 연구로 그들 가운데 천주교 신앙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그들 중 한 명인 이승훈(李承薰, 베드로)이 동지사 일행을 따라 북경에 간 기회에, 즉 1784년 초에 세례를 받고 돌아왔다. 그는 귀국한 직후 친척과 친지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개종한 사람들로 최초의 천주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이 기쁜 소식은 후에 북경 주교에 의해 로마에 전해졌고, 포교성은 1792년에 조선 선교지를 보호하고 지도하도록 북경 주교에게 위임하였다. 이 위임은 조선 선교지도 포르투갈의 선교 보호권에 속하게 되었음을 의미하였다. 왜냐하면 북경교구 자체가 보호권 교구였기 때문이다.
새로 탄생하였지만 평신도로만 구성된 신앙 공동체는 성사를 받기 위해서는 성직자가 반드시 필요함을 뒤늦게 깨달았고, 북경 주교에게 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에 북경 주교는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를 파견하였으나, 그는 조선 입국 5년 만에 박해로 순교하였다. 이에 조선 교우들은 성직자 영입 운동을 다시 전개하였고, 1811년 말에는 북경 주교와 교황에게 서한을 보내어 선교사의 조속한 파견을 요청하였다. 한편 북경의 포르투갈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직접 조선에 가려고 하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의 보호권을 지키려고 다른 회의 선교사들이 조선에 가려는 것까지 방해하였다.
조선 진출 : 1826년에 조선의 신자들은 다시 교황에게 서한을 보내어 선교사의 파견을 재촉하였다. 마카오 주재 포교성 대표 움피에레스(Umpierres) 신부는 이 서한에 "조선에 필요한 것은 조선을 위해 전념할 수 있는 수도회이고, 또 조선 선교지는 북경교구에서 독립시키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는 의견서를 동봉하여 교황청으로 보냈다. 포교성은 이 의견에 따라 우선 예수회와 교섭하였으나 실패하자, 파리 외방전교회에 의뢰하였다. 외방 전교회에서는 대목 주교들의 의사를 타진해야 하는 등 숙고의 여유가 필요하다며 결정적인 회답을 미루고 주교들의 의사를 타진하는 회람을 각 대목구에 보냈다. 이에 시암 대목구의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을 선교지로 수락하는 것이 당장에는 곤란하다고 생각된다면 해결을 기다리는 동안 우선 조선에 한두 명의 선교사를 보내자는 대안을 제시하였고, 자신부터 조선 선교사로 지원하겠다면서 포교성에도 같은 지원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외방 전교회 측에서는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조선을 절대로 단념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브뤼기에르 주교의 지원에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포교성의 결의에 따라 조선 선교지를 북경에서 독립된 대목구로 설정하고, 또 브뤼기에르 주교의 지원을 받아들여 그를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하였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지원을 반대하였던 외방 전교회는 조선 선교지의 수락을 주저하였으나, 결국 1833년 포교성의 권고를 받아들여 조선 선교지를 완전히 수락하였다. 위임 문제는 이렇게 해결되었지만, 북경교구에서 조선을 결코 단념하지 않을 것이라는 외방 전교회의 예측은 현실로 나타났다.
실제로 북경 주교는 조선에 대한 보호권을 단념하지 않았으며, 브뤼기에르 주교를 조선 선교지에 침입한 자로 간주하고 그의 조선 입국을 온갖 방법으로 방해하기 위해서 북경교구 관할 만주 요동 지방의 신자들이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숙소를 제공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브뤼기에르 주교는 북경에서 조선에 들어가려면 요동 지방을 반드시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과 향후 조선 선교사들의 통행을 용이하도록 하기 위해 이 지방을 북경교구에서 독립시켜 외방 전교회에 위임토록 포교성에 건의하였다. 이에 포교성은 그의 건의를 받아들여 1838년 요동 지방을 대목구로 독립시켜 외방 전교회에 위임하였다. 그렇게 요동을 통과하는 문제는 해결되었으나, 이번에는 조선 교우들이 브뤼기에르 주교의 입국을 거부하였다.
조선 대목구장인 브뤼기에르 주교의 입국을 준비할 사명을 띠고 먼저 조선에 입국한 중국인 유 파치피코(余恒德) 신부가 그를 대목구장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북경 주교만이 자신의 장상이라고 하며 조선 교우들을 선동하여 브뤼기에르 주교의 입국을 방해하고 지연시켰다. 이러한 소식에 접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 교우들을 설득하기 위해 1834년 말 자신의 사자(使者)를 북경에 보냈다. 그는 북경에서 조선 교우들을 만났고, 그들로부터 1835년 말에 주교를 맞아들이겠다는 확약을 받았다. 이렇게 모든 장애가 제거되자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5년 10월 몽골의 교우촌 서만자(西灣子)를 떠나 그를 안내하기로 한 조선 교우들이 기다리고 있을 국경으로 향하였으나, 조선 땅을 눈앞에 두고 갑자기 병사하였다. 한편 서만자에서 다음 입국 기회를 기다리고 있던 모방(P.P. Maubant, 羅伯多祿) 신부는 그의 부음을 듣고 즉시 현장으로 달려가 주교의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대목구장으로부터 필요한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부주교의 자격으로 브뤼기에르 주교를 입국시키기로 예정되어 있던 모든 준비를 이용하여 1835년 말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다. 그의 입국 2년 후 제2대 조선 대목구장 앵베르(L.-J.-M. Imbert, 范世亨) 주교가 입국함으로써 북경교구로부터 조선 대목구의 독립은 확고부동한 것이 되었다.
선교사들의 입국과 활동 : 모방 신부는 입국 직후 외방 전교회의 첫째 목표에 따라 현지인 성직자 양성에 착수하여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최방제(崔方濟,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등 3명의 소년을 신학생으로 선발하였다. 그러나 박해로 조선 내에 신학교를 설립할 수 없었기에, 1836년 말의 동지사 편을 이용하여 그들을 마카오 대표부로 보내어 성직자로 양성시켰다. 그들은 마카오에서 병사한 최방제를 제외하고 모두 사제 서품을 받았다. 김대건은 1845년 중국 상해에서 최초의 조선인 신부로 서품되어 그해에 귀국하였고, 최양업은 1849년에 역시 상해에서 사제로 서품된 후 그해 말에 귀국하여 12년 동안 사목에 헌신하다가 과로로 사망하였다. 김대건 신부는 1846년 병오박해(丙午迫害)로 순교하였고, 그의 순교를 전후하여 1839년에는 3명, 1866년에는 9명의 선교사들도 순교하였다. 그들 중 3명의 주교를 포함한 10명은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한국 순교자들과 함께 시성되었다.
계속되는 박해로 국내에 신학교를 세우는 것은 여전히 불가능하였으나, 비교적 평온하였던 철종(哲宗, 1849~1863)의 치세 중인 1855년에 제천 배론에 최초의 신학교를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10년 후의 또 다른 박해로 결실을 내지 못한 채 폐쇄되었다. 한편 페낭 신학교로의 신학생 파견은 그 후에도 계속되어 1884년까지 그 수가 24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낯선 페낭의 기후와 풍토를 이겨내지 못하였기 때문에 국내에 신학교 설립이 시급하였다. 1882년 이래 구미 열강과의 수호 조약으로 종교가 어느 정도 묵인되자, 마침내 1885년 원주 고을(현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부평리)의 산속 부엉골에 신학교를 세워서 페낭의 유학생들을 본국으로 소환하였다. 부엉골 신학교는 한불조약(1886)의 인준으로 선교의 자유가 다소 허용된 1887년에 서울의 용산으로 옮겨 대 · 소신학교로 완전히 정착되었다. 이 용산 신학교에서는 1896년에 3명이 사제 서품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1900년까지 11명의 신부를 배출하였는데, 그들은 모두 페낭에서 돌아온 학생들이었다.
교세의 확장과 대목구의 분리 : 1831년 조선 대목구의 설정 이후 1911년까지 80년 동안 신자수 76,000여 명, 선교사 48명, 조선인 성직자 21명으로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이에 제8대 대목구장 뮈텔(G.-C.-M. Mutel, 閔德孝) 주교는 조선 대목구의 분할을 요청하였고, 교황청은 1911년 4월에 경상도와 전라도 두 지방을 조선 대목구에서 분할 · 독립시켜 대구 대목구를 신설하였다. 그리고 이 대목구를 같은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하였으며, 조선 대목구는 서울 대목구로 이름을 바꾸었다. 대구 대목구로의 일부 이적으로 서울 대목구의 신자수는 약 5만 명, 선교사는 35명, 조선인 신부는 16명으로 줄었다. 수는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의 발발로 더욱 감소되었는데, 전체 선교사 수의 3분의 1 이상인 11명이 동원령으로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그로 인해 서울 대목구는 선교사의 부족을 현저하게 느끼게 되어 본당 구역을 다시 조정, 두 본당을 1명의 선교사에게 맡기는 등 비상 조치를 취하였지만 신부들의 절대 부족을 메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6명의 새 신부가 탄생함으로써 중대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일찍이 모방 신부가 현지인 성직자 양성을 서두른 덕분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전사한 3명을 제외한 모든 선교사들이 돌아왔다. 그러나 여전히 선교사의 부족을 느끼고 있을 무렵, 1921년 11월에 뮈텔 주교는 조선 선교지로 파견할 선교사 1명의 임명 통고를 받았다. 이에 대해 뮈텔 주교는 1914년 이래 7년 만에 처음이지만, 그때 부임한 불로(J.M.J. Boulo, 吳) 신부는 이듬해에 전사하였기에 실제로는 1911년 샤보(J.E.G. Chabot, 車麗松) 신부의 도착 이후 10년 만에 처음 있는 선교사 파견이라며 못마땅해하였다. 유럽에서 1911~1920년 동안 선교사 출발자가 연평균 11명으로 급격히 하락한 것은 이렇게 조선 선교지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서울 대목구는 대구 대목구에 선교지의 3분의 1을 넘김으로써 짐을 덜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광대한 지역이 남아 있었다. 특히 동북부의 함경도와 서북부의 평안도는 선교 면에서 낙후되어 있었다. 더구나 평안도는 프로테스탄트의 교세 확장이 위협적이어서 이 지방들에 대한 집중적인 선교 활동이 시급한 문제로 등장하였다. 효율적인 선교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협조자를 찾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겠다는 판단하에 뮈텔 주교는 이미 서울에 진출하여 교육 사업에 종사하고 있던 독일 상트 오틸리엔 베네딕도회에 평안도 지역을 의뢰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평안도에서 프로테스탄트에 대항하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하고 함경도 지역을 택하였다. 이리하여 1920년에 함경도가 서울 대목구에서 분리되어 독립된 원산 대목구로 베네딕도회에 위임되었다.
1921년부터는 유럽에서 선교사 출발자가 연평균 22명을 유지함으로써 조선으로의 선교사 파견도 1925년부터 다시 계속되어 1927년을 제외하고는 1930년까지 해마다 1명씩 도착하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평안도를 새 선교구로 독립시키기에는 역부족이어서, 평안도 지방에서의 원활한 선교 활동을 위해 미국의 메리놀 외방전교회를 불러들여야 하였다. 1927년에는 서울 대목구에서 평양 지목구가 분리 · 독립되어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위임되었다. 대구 대목구에서는 1937년에 전라남도를 광주 지목구로 독립시켜 아일랜드의 골롬반 외방선교회에 위임하였고, 2년 후인 1939년에는 서울 대목구에서 강원도를 분리시켜 춘천 지목구로 독립시킨 후 골롬반 외방선교회에 위임하였다.
1922년 중국에서 2명의 현지인 지목구장이 탄생하자, 이에 자극되어 조선에서도 현지인 지목구의 준비 단계로 감목 대리구가 설정되었다. 서울 대목구에서는 1928년에 황해도를 감목 대리구로, 대구 대목구에서는 1931년 조선 대목구 설정 100주년을 기념하여 전라북도를 감목 대리구로 설정하여 현지인 지목구를 준비시켰다. 후자는 1937년에 지목구로 승격되어 현지인 지목구장이 임명되었으나, 황해도 감목 대리구는 끝내 현지인 지목구로 승격되지 못하였다. 또한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조선에서는 아직 현지인 주교가 탄생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일제는 조선의 외국인 주교를 모두 일본인 주교로 대치하려 하였으나, 그 음모가 사전에 탄로나 서울 대목구에서는 대목구장을 조선인 주교로 착좌시킬 수 있었다. 그 결과 1942년 조선에서도 최초의 현지인 주교인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주교가 탄생하였다.
그런데 1948년에 로마는 서울 대목구 관하의 충청남도를 선교구로 독립시켜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하였으며, 1958년에는 이를 대전 대목구로 승격시켜 전 서울 대목구장이었던 라리보(A.J. Larribeau, 元亨根) 주교를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하였다. 그가 1964년에 고령으로 대목구장직을 사직하자 교황청은, 1969년에 또다시 대구대교구에서 안동 지역을 안동교구로 분리 · 독립시켜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하였다. 교황청의 이러한 결정 배경에는 한국인 주교들의 요청—교구를 넘겨받은 고마움에서 교구의 일부를 떼어서라도 반드시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보답하고 싶은—이 있었을 것이다.
마침내 1962년 한국에 교계 제도가 설정되었다. 대목구나 지목구 등은 정식 교구가 아니라, 교계 제도로 이끌기 위한 잠정적 준교구이고, 따라서 그 최종 목표는 현지인 성직자 양성과 병행하여 현지인들에게 교구를 넘겨주는 데 있다. 그렇지만 교계 제도가 수립된 후에도 한국 교회에는 외국인 주교들이 남아 있었다.
업적 및 평가 : 조선 선교지를 대목구로 승격시켜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한 것은 무엇보다도 한국에 지속적인 선교사 파견을 보장하려는 데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조선 선교지가 포르투갈의 보호권에서 해방되어야 하였다. 물론 그 보호권의 횡포를 막기 위하여 교황 소칙서에는 조선 대목구가 북경교구에서 독립된 대목구임이 확실하게 명시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경교구는 조선 선교지에 대한 보호권을 양보하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브뤼기에르 주교를 횡령자로 간주하여 그의 조선 입국을 온갖 방법으로 방해하고 지연시켰다. 그 때문에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에 입국하기 위해 3년 동안 온갖 고생과 수난을 겪어야 하였고, 결국은 입국을 앞두고 선종하였다. 그의 죽음은 패배로 보였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승리였다. 왜냐하면 그만큼 한국에서 파리 외방전교회의 위치가 더욱 확고해졌기 때문이다. 파리 외방전교회는 현지인 성직자 양성에 있어서도 한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들이 양성한 한국인 성직자들에게 교구를 이양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아시아에서 제일 늦었다는 아쉬움과 불명예를 남겼다.
그동안(1831~2004) 한국에 파견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의 총수는 173명이고, 현재 한국에 남아 있는 선교사는 15명이다. 이들은 현재 신학교의 교수 또는 수도회의 지도 신부 등 특수 사목 분야에서 봉사하며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 대구대교구 ; 로드, 알렉상드르드 ; 모방, 피에르 필리베르 ; 뮈텔, 귀스타브 샤를 마리 ; 배론 ; 북경대교구 ; 브뤼기에르, 바르텔레미 ; 서울대교구 ; 선교회 ; 성체회 ; 신학교 ; 앵베르, 로랑 조제프 마리위스 ; 유 파치피코 ; 인류 복음화성 ; 페낭 신학교)
※ 참고문헌 A. Launay, Histoire générale de la Société des Missions-Etrangères, vol. 3, Paris, 1894/ J. Guennou, Les Missions Etrangères, Paris, 1986/ G.M. Oury, Mgr François Pallu ou les Missions Etrangères en Asie au 17e siècle, Paris, 1986/ G. Moussay · B. Appavou, Répertoire des Membres de la Société des Missions Etrangères 1659~2004, Paris, 2004/ A. Choi, L'Erection du premier Vicariat apostolique et les origines du catholicime en Corée, Suisse, 1961/ 최석우, <조선 대목구 설정의 교회사적 의미>, 《교회사 연구》 4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3. [崔奭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