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

〔영〕 Pakist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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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시아의 서부에 위치하고 있는 국가로 공식 명칭은 파키스탄 이슬람 공화국(Islāmic Republic of Pakistan)이며, 1972년 이전에는 서파키스탄(West Pakistan)으로 불렸다. 수도는 이슬라마바드(Islāmābād)이다. 파키스탄은 아라비아 해와 접하고 있고 동쪽으로는 인도, 서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란, 북쪽으로는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인류 4대 문명 발상지 중 하나인 인더스(Indus) 문명의 대부분의 유적들이 현재 파키스탄에 있다. 국토의 면적은 803,940k㎡이고, 동북과 서북 지방은 산악 지대이며 동부 지방은 인더스 강 유역의 평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후는 아열대성 기후에 속하여 고온 건조형이며, 연평균 기온은 섭씨 27도 정도이고, 인구는 약 1억 5,000만 명(2004.7)이다. 인종은 펀자브족(Punjab), 신드족(Sind), 파슈툰족(Pashtun, Pathan), 발루치족(Baluchi), 무하지르(Muhajir, 분리 독립 당시 인도에서 이주한 무슬림들의 후손) 등 5개 집단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언어는 펀자브어, 신드어 등 10여 개의 언어를 사용하며, 우르두어(Urdu)와 영어가 공용어이다. 종교는 무슬림이 전체 인구의 97%(수니파 77%, 시아파 20%)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인이 2%, 나머지는 힌두, 시크 등 소수 종파들로 구성되어 있다. 연방 공화국인 파키스탄은 4개의 주, 1개의 직할령, 1개의 수도 직할령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국가 형태는 내각 책임제, 국가 원수는 대통령이고, 의회는 양원제이다.
〔역 사〕 초기 역사 : 사람들이 처음 발루치스탄(Baluchistan) 지역에 정착한 때는 기원전 3500년경이다. 이후 그들이 동쪽 인더스 강 유역으로 이주하여 하라파(Harappa) 등 여러 도시 문명들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인더스 문명은 기원전 1500년경 갑자기 사라졌고, 기원전 1000년경까지 아리아어를 쓰는 민족이 이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기원전 6~5세기 불교 문헌에서는 인더스 강 유역에 있었던 간다라 국(Gandhara)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기원전 327년 알렉산더 대왕(기원전 336~323)이 페르시아 아케메니아 제국의 변경 지역을 정복하기 위해 간다라를 침입하였고, 기원전 3~2세기에는 마우리아 제국의 영토가 되었으며, 후에 쿠산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힌두 문화 형성기(320~540)에는 굽타 왕조가 인더스 강 유역을 포함한 인도 북부 지역을 지배하였다. 8세기에 처음으로 무슬림 정복자들이 발루치스탄에 들어왔으며, 그 후 이 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13세기에 이슬람 세력이 통합되면서 델리(Delhi)를 중심으로 한 술탄 왕국이 시작되어 16세기 초까지 인도 대륙 대부분을 지배하였다. 1526~1761년까지 무굴 왕조가 인도를 지배하였으나, 1757년 영국 동인도 회사가 다른 식민 세력을 몰아내고 무굴 제국을 정복하여 이후 1세기 동안 동인도 회사가 인도 대부분을 지배하였다.
분리 독립 과정 : 1857년 세포이(Sepoy, 동인도 회사에 고용되어 있었던 인도인 용병) 항쟁의 실패는 인도 내에서 무슬림 세력의 정치적 · 사회적 몰락을 가져왔다. 무굴 제국 시대에 사회 지배층을 형성하였던 무슬림들은 2등 시민으로 전락하였고, 영국령 인도 제국 정부의 기피 대상이 되었다. 1885년 영국인들의 후원으로 창설된 인도 최초의 정당인 인도 국민 회의당(Indian National Congress)에서도 무슬림은 소수에 불과하였으며, 서구식 교육을 받은 사람은 더욱 드물었다. 무슬림들이 사회적으로 낙후되었던 것은 정치적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이 전통적인 이슬람 생활 방식에 집착하였고, 영국인들이 운영하는 교육 기관에 진학하기를 꺼려하였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영국의 기대와는 달리 국민 회의당이 민족주의적 색채를 강화하자, 영국은 분리 통치 정책을 시행하여 1906년 이슬람 동맹당(Muslim League)의 창설을 후원하였다. 세속적인 성격을 지녔던 국민 회의당에 비해 이슬람 동맹당은 무슬림들의 이익을 위해 무슬림만으로 구성된 정당이었다. 즉 사회의 낙후 계층이나 소수 집단으로 전락하는 것을 두려워하던 무슬림들이 정치 세력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와 같은 배경으로 탄생한 이슬람 동맹당은 독립 운동 과정에서 국민 회의당과 함께 두 개의 중심 축을 이루었으나, 서로 협조하기보다는 경쟁하고 견제하는 관계였다.
1930년대에 들어서 국민 회의당과의 불화가 더욱 노골화된 이슬람 동맹당은 분리 운동을 표면화시켰다. 즉 무슬림의 권리가 더이상 힌두교도와 영국인에게 짓밟혀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공식화하였고, 인도 서북부에 무슬림만의 자치 지역을 요구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파키스탄의 국부(國父)로 불리는 진나(Mohammad Ali Jinnah, 1876~1948)에 의해 분리 독립은 정치적 현실성을 띠게 되었고, 영국은 이 상황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용하였다. 따라서 국민 회의당과 이슬람 동맹당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고, 대영 투쟁에서도 서로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 독립이 거의 확실시된 1946년 말부터 영국령 인도 제국 전역에서는 힌두교도와 무슬림 사이의 피와 폭력의 투쟁이 난무하였다. 이 두 종교의 대립이 극에 다다르자 영국은 중재자의 역할을 하기보다는 이 분쟁에서 발을 빼려는 노력을 하다가, 결국 무슬림이 많이 사는 펀자브 지방과 벵골(Bengal) 중 무슬림이 밀집해 있는 지역을 각각 동 · 서 파키스탄으로, 그리고 그 외 지역을 인도로 한다는 원칙을 제시하였다. 영국의 제안에 대해 국민 회의당과 이슬람 동맹당 사이의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분할 대상이 된 지역에서는 엄청난 학살극이 벌어졌다. 즉 상대편의 마을이 사라지면 그 지역이 자기 측의 영토가 된다는 단순한 논리에 사로잡혀 힌두교도와 무슬림들이 서로를 공격한 것으로, 이 와중에 학살된 사람의 수가 무려 50~70만 명에 달하였다. 이 학살은 오늘날까지 인도와 파키스탄 국민들 사이의 감정적 앙금으로 남아 있다.
독립과 혼란 : 1947년 8월 15일 파키스탄은 독립 국가로 탄생하였다. 그러나 이 국가는 서로 1,600km 떨어진 두 개의 국토, 즉 동파키스탄과 서파키스탄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국가라는 역사상 유래가 드문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이러한 구조적인 약점과 함께 인도와의 분할로 인한 행정 마비, 철도 · 전력 · 관개 시설 등의 마비로 국민들의 기본 생활마저 위협받는 실정이었고, 강력한 지도자였던 진나가 1948년 사망하자 더욱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인물은 없었고, 지역 감정을 지지 기반으로 하는 정당들의 난립과 정쟁으로, 헌법조차도 독립 후 9년이 지난 1956년에야 제정될 수 있었다.
제1차 인 · 파 전쟁 : 영국은 독립 인도의 장래를 각 집단의 의사에 맡긴다며 독립 이후의 상황에 대한 어떤 대비책도 마련해 두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가 카슈미르(Kashmir) 문제였다. 히말라야 산맥에 위치한 카슈미르는 영국령 인도 제국 시대에 500여 개에 달하던 봉건 제후국의 하나로서, 영국의 간접 통치를 받았다. 이곳의 군주 하리 싱(Hari Singh)은 힌두교도였으나, 국민의 절대 다수는 무슬림이었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 독립이 확실해지자, 하리 싱은 파키스탄에 합병되자니 자신의 지위가 불확실해지고 인도에 합병되자니 국민들의 반발을 막을 수가 없는 문제에 직면하였다. 결국 그는 독립 국가로 남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파키스탄은 국민의 절대 다수가 무슬림인 카슈미르가 자국 영토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1947년 10월 아프가니스탄 국경 부근의 파슈튼족을 사주하여 카슈미르를 침공하였다. 자신의 군대가 패하면서 수도 스리나가르(Srīnagar)까지 함락 직전에 이르자 당황한 하리 싱은 카슈미르 이양을 조건으로 인도 정부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인도 정부는 즉시 329명의 병사와 8톤의 물자를 10월 27일 스리나가르로 급파하였고, 곧이어 약 10만 명의 인도군을 파견하였다. 인도가 개입하자 파키스탄도 정규군을 카슈미르에 투입하여 제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하였다.
1949년 1월 국제 연합(UN)의 개입으로 휴전이 이루어졌으나 카슈미르의 3분의 1은 파키스탄이 차지하였고, 나머지는 인도의 소유가 되었다. 그러나 인도와 파키스탄은 카슈미르 전역이 자국의 영토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현재도 고수하고 있다. 인도는 1947년의 이양이 합법적인 것이었으므로 카슈미르는 인도의 영토라는 입장이고, 파키스탄은 국민의 의사와 관계없이 하리 싱 단독으로 결정한 것이므로 국민 투표에 부쳐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카슈미르 문제는 현재도 인도와 파키스탄의 관계 개선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군부 통치 : 독립 이후 혼란이 지속되는 가운데, 1958년 아유브 칸(Mohammad Ayub Khan, 1907~1974) 육군 참모총장의 무혈 쿠데타가 성공하였다. 한 일간지는 이 쿠데타를 '하늘로부터 내려온 신의 은총'이라고 평하였을 정도로 당시 파키스탄의 정국은 혼란스러웠다. 1960년 대통령에 취임한 아유브 칸은 '기본적 민주주의'라는 구호 아래 군부의 지원을 배경으로 독재 권력을 유지하였다. 그의 통치하에서 파키스탄의 경제가 호전된 것은 사실이었고, 한때는 '세계 은행의 총아'라는 호칭까지 얻었다.
1965년 파키스탄의 대(對)인도 강경파들은 '카슈미르의 해방'을 명분으로 아유브 칸을 압박하여 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을 일으켰다. 1962년 인도-중국 전쟁에서의 인도의 패배와 네루(Jawaharlal Nehru, 1889~1964)의 죽음으로 인한 인도 국내의 불안을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48일의 이 전쟁에서 파키스탄군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도군에게 몰리는 양상을 보이면서 이 전쟁이 군사적 모험주의에 불과하였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1969년 국내 정정의 불안 등을 이유로 아유브 칸은 사임을 강요당하였고, 당시 육군 참모 총장이었던 야히아 칸(Agha Mohammad Yahya Khan, 1917~1980)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방글라데시의 탄생 : 아유브 칸의 치하에서 파키스탄의 경제가 발전하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서파키스탄에 국한된 것이었다. 또 정부와 군부의 주요 요직은 모두 서파키스탄인이 차지하고 있었고, 동파키스탄인들은 2등 시민이라는 자괴감에 빠져 있었다. 이런 불만이 누적되어 1970년 실시된 파키스탄 최초의 의회 총선거에서 동파키스탄의 분리 자치를 요구하는 아와미 연맹(Awamy League)이 절대 다수의 의석을 차지하였다. 이 결과에 당황한 야히아 칸은 의회 출범을 무기한 연기하였지만, 1971년 4월 아와미 연맹은 동파키스탄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파키스탄 정부는 즉시 군대를 투입하여 동파키스탄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막대한 수의 피난민들이 인도의 국경을 넘어갔다. 인도가 국경의 안전 등을 이유로 동파키스탄에 군대를 투입하자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시작되었고, 1971년 12월 파키스탄군의 항복과 함께 동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Bangladesh)라는 새로운 국가로 독립하였으며, 서파키스탄만이 파키스탄으로서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부토의 집권 : 1971년 12월 야히아 칸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지난 총선거에서 서파키스탄 지역을 석권하였던 파키스탄 인민당(Pakistan People's Party)의 부토(Zulfikar Ali Bhutto, 1928~1979)에게 정권을 이양하였다. 13년 만에 민간 정부가 탄생한 것이다. 부토는 1973년 헌법을 개정하여 내각 책임제로 전환하고, 총리로 취임하여(1973~1977) 주요 기간 산업의 국유화, 지주 계급에 대한 세금 부과 등의 개혁 정책을 시행하고 이슬람화(Islamization)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야당의 공세와 민심 이반은 날로 심해져 1977년 총선거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 선거에서 부토의 인민당은 과반수 의석의 확보에 성공하였으나, 9개 야당 연합 세력인 파키스탄 국민 동맹의 부정 선거 주장으로 전국은 폭동 사태에 빠졌다. 부토는 야당 지도자들을 체포하는 등의 강압 정치를 썼으나, 육군 참모총장 지아 울 하크(Mohammad Zia-ul-Haq, 1924~1988)가 쿠데타를 일으켜 부토를 체포하였다. 이에 부토는 정적 살해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1979년 4월에 교수형을 당하였으며, 그의 사형 집행은 당시 세계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다시 군부 통치로 : 1978년 대통령에 취임한 지아 울 하크는 군부의 강력한 지지를 바탕으로 정치, 사법, 경제의 이슬람화를 추진하였고, 그의 통치 기간 중 민간 기업을 중심으로 경기가 호황을 누렸다. 특히 1979년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의 여파로 파키스탄은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군사 · 경제 원조를 받을 수 있었다. 비록 강권 정치를 펼쳤지만, 그의 통치 기간 중 파키스탄은 정치 · 경제적으로 비교적 안정을 누렸다. 하크는 1988년 비행기 폭발로 암살당하였다.
베나지르 부토 : 1988년 11월 실시된 총선거에서 1979년 처형된 줄피카르 알리 부토의 딸인 베나지르 부토(Benazir Bhutto)가 이끄는 인민당이 승리를 거두었다. 이슬람 국가 최초의 여성 총리라는 점은 세계적으로 주목받기에 충분하였지만, 그녀의 통치 기간에는 정치적 음모가 난무하고 업적은 보잘것없었다. 결국 부토는 1990년 무능력과 부패를 이유로 총리직에서 축출되었다. 1990년 10월에 실시된 총선거에서 파키스탄 무슬림 연맹(Pakistan Muslim League)이 승리하여 나와즈 샤리프(Mohammad Nawaz Sharif)가 총리가 되었다. 이 정권은 경제 자유화와 부흥에 주력하였으나, 1993년 나와즈 샤리프는 군부의 압력으로 사임하였고, 곧이어 실시된 총선거에서 부토가 총리로 재취임하였다. 부토는 군부와 야당과의 관계 개선을 통한 국가적 문제 해결에 진력하는 등 과거와는 다른 노련한 정치인의 모습을 보였지만, 1996년 부패를 이유로 다시 축출되었고, 1997년 총선거에서 나와즈 샤리프가 재집권하였다. 부토와 그녀의 남편 자다리(Asif Ali Zadari)는 1999년 부패 등의 혐의로 기소 되었으며, 2004년 현재 부토는 영국에 망명 중이다.
핵 실험과 군부 통치의 부활 : 1998년 5월 인도의 핵 실험에 이어 파키스탄도 핵 실험을 감행하였다. 그동안 핵 보유를 의심받아 오던 두 국가가 공식적으로 핵 보유를 선언한 것이다. 파키스탄의 핵 실험은 인도에 대한 방어적인 것이었지만,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국가들의 경제 제재를 피할 수 없었다. 1999년 10월 나와즈 샤리프 총리는 당시 육군 참모총장 무샤라프(Pervez Musharraf)를 해임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무샤라프를 추종하는 군부에 의해 축출되었다. 그는 2000년에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곧 사우디 아라비아로의 망명이 허용되었다.
무샤라프는 2001년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며, 곧이어 벌어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적극 지원하였다. 이로 인해 1998년 핵 실험으로 야기된 미국의 경제 제재가 해제되었고, 무샤라프는 이슬람권에서 미국의 가장 충실한 협조자로 평가받게 되었다. 또 그는 인도와의 관계 개선에도 적극성을 보여 2001년 인도를 직접 방문하였고, 2004년 1월에는 인도 수상 바즈페이(Atal Behari Vajpayee)의 파키스탄 방문을 성사시켜 1947년 분리 독립 이래 가장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국내 통치에서는 군부 통치를 더욱 강화시키고 있어 야당으로부터 '독재자'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2004년 4월에는 의회가 군부 주도의 국가 안전위원회(National Security Council)의 창설을 승인하게 만들어, 군부의 정치 개입을 제도화시키고 있다는 우려도 낳고 있다.
〔가톨릭의 역사〕 초기 선교 활동 : 고대 비단길(Silk Road)은 파키스탄의 북부를 통과하고 있었다. 열두 사도 중 한 명인 토마스도 이 길을 통해 인도에 갔다고 여겨진다. 증명하기는 어렵지만 서기 3세기경에 이 지역에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존재하였으리라는 증거들이 있다. 비 단길 근처의 지역에서 네스토리우스파의 십자가 등, 유물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활동을 알리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1569년 고아(Goa)의 예수회원들이 무굴 제국 황제 악바르(Akbar, 1556~1605)를 라호르(Lahore)에서 만났고, 환대를 받아 악바르의 거주지인 파테푸르 시크리(Fatehpur Sikri)까지 동행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그러나 그들의 14년에 걸친 노력은 실패로 끝나 1583년에 철수하였고, 같은 해의 2차 선교단과 1594년의 3차 선교단이 결실을 맺었다. 1597년 라호르에 대규모 성당이 건축되었으며, 1604년 무굴 황제는 백성들이 그리스도교를 믿는 것을 허용하였다. 고아에는 더 많은 사제들이 파견되어 페르시아어 역사서를 발간하였고, 선교 활동을 하였다. 1606년 라호르의 가톨릭 신자수는 약 50명이었으며, 그들은 포르투갈인이 다수인 유럽인들과 아르메니아인들 그리고 개종한 인도인들의 세 부류로 구분되었다. 그러나 악바르의 손자인 샤 자한(Shāh Jahān, 1628~1658)은 선교 활동에 관대하지 못하여 1650년 라호르의 성당을 파괴하였다.
1587년부터 라호르는 카피리스탄(Kāfiristān, 현 Nūrestān으로 파키스탄의 북부와 아프가니스탄의 남부에 해당)에 대한 선교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지만, 1700년 이후 예수회 선교사가 줄어들기 시작하여 1750년에는 이곳에 주둔하는 병사들을 위한 사제조차 없게 되었다. 1752년에 라호르 주둔 병사들은 무굴 황제 아메드 샤(Ahmed Shāh)에 의해 카불(Kabul)로 추방되었다. 16~17세기에 걸쳐 고아와 봄베이(Bombay)에서 온 아우구스티노회와 가르멜회 수사들이 신드 지방에서 선교 활동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지만, 자세한 활동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1672년의 박해로 선교 활동이 중단되었다가, 1842년 영국이 이 지역을 정복한 이후 재개되었다.
근대 교회의 시작 : 1846년에 영국이 펀자브 지역을 합병한 이후로, 영국 시민, 공무원, 군인들뿐만 아니라 남부 인도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을 위해 근대적 교회 활동이 시작되었다. 아그라(Agra)에서 온 카푸친 작은 형제회 수사들은 라호르에서, 봄베이에서 온 가르멜회 수사들과 예수회원들은 신드와 발루치스탄에서 활동하였다. 이 시기에 식민 통치의 영향으로 건설된 주요 행정 및 교통 중심지의 모든 군사 주둔지에는 성공회, 장로회, 가톨릭 교회가 세워졌다.
1890년까지 교회는 이 지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에 대한 활동에 중점을 두었지만, 그 후 라호르와 시알코트(Siālkot) 지역의 힌두교 하층 카스트들의 다양한 요구로 파키스탄 가톨릭 교회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파키스탄 가톨릭 신자의 80% 이상이 힌두교 하층 카스트들의 후손이다. 이 시기에 다양한 선교회에 의해 세워진 자선 및 교육 기관들이 도시와 농촌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독립 파키스탄과 가톨릭 : 1947년 독립 당시 파키스탄의 가톨릭 교회는 봄베이 교구 소속의 신드, 카이르푸르(Khairpur), 발루치스탄과 델리 대교구 소속의 펀자브, 바하왈푸르(Bahāwalpur) 등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새로운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1948년 5월 28일 신드와 발루치스탄을 관할하는 카라치(Karāchi) 교구가 설립되고 2년 후 대교구로 승격되었다. 1950년에 파키스탄의 교계 제도가 설립되었으며, 1958년에는 카라치 대교구에서 하이데라바드(Hyderābād) 교구를 분리하여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위임하였다. 그리고 1960년에는 물탄(Multān) 교구와 리알푸르(Lyallpur, 현 Faisalābād) 교구를 설정하여 도미니코회에 위임하였다. 1973년 교황 바오로 6세(1963~1978)는 카라치 대교구장인 코르데이로(J. Cordeiro) 대주교를 추기경으로 서임하였다. 1994년 4월 23일에는 라호르가 대교구로 되어 트린다데(A. Trindade) 대주교가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현재 라호르에는 가르멜회 수도원이 있고, 카라치에는 도미니코회 수녀원이 있다.
파키스탄의 그리스도교 신자의 절반 정도는 프로테스탄트이다. 1970년 영국 성공회, 감리교, 루터교 그리고 장로교가 연합하여 창립한 파키스탄 교회(The Church of Pakistan)가 가장 많은 신자수를 확보하고 있다. 여기에 속하지 않은 교파들로는 구세군, 예수 강림교, 침례교 등과 소규모의 성령 강림 운동 및 복음 전파 운동에 참여하는 단체들이 있다. 교회들 사이의 관계는 일반적으로 우호적이며, 특히 절대적으로 소수인 그리스도교 집단의 복지와 생존이 위협당할 때에는 상당한 단결력을 보여 준다.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과 가톨릭 주교 회의는 정 기적인 모임을 가지고 있으며, 정부에 대한 공동 대표 위원회를 구성하기도 한다. 보다 초교파적인 활동은 무슬림과 그리스도인 사이의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해 1967년 창설된 라왈핀디(Rāwalpindi)의 그리스도교 연구소(Christian Study Center)에서 이루어진다.
교회와 사회 : 가톨릭 교회가 파키스탄에 얼마나 기여하는지 수치화하기는 어렵지만 교회의 존재와 효율성이 '선교적 열정'이라는 표현으로, 정치 지도자들이 공무원들을 자극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수십 년 동안 질 높은 교육과 의료 지원은 선교 단체에서만 가능하였다. 파키스탄에는 600개가 넘는 가톨릭 교육 기관들이 있으며, 이곳에서는 파키스탄어, 지방 공용어, 영어로 그리스도인, 무슬림, 힌두교 학생들을 교육하고 있다. 그러나 1969년 이래 파키스탄 정부는 그리스도교 기관 및 외국 선교 단체의 활동을 제약하려는 시도를 증대시켜 왔고, 1972~1974년에 대부분의 사립 학교와 대학들이 국유화되었다. 비록 이 법률이 무슬림 교육 기관에도 적용되었지만, 주된 목적은 파키스탄 내에서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것이었다.
전통적인 의료 기관을 제외한다면, 전체 인구의 80%가 거주하는 농촌 지역의 의료 지원은 항상 교회가 담당해왔으며, 나병 퇴치와 치료, 장애인과 노인 그리고 빈민 구호 활동에서도 교회는 항상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였다. 최근에는 마약 중독의 치료와 예방을 위한 진료소들을 개설하여 운영하고 있으며, 교구 단위로 운영되는 저렴한 가격의 주택 공급 계획으로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받고 있다. 가톨릭 구호 기구(Catholic Relief Service)와 카리타스(Caritas) 같은 단체들은 정부와 협조하여 난민과 이주민들을 위한 정착 및 보건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파키스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제기되는 지속적인 문제는 이슬람 국가에서 살아가는 소수 종파로서의 정체성 문제이다. 1965년과 1971년의 인도와의 전쟁 기간 중 그리스도인과 힌두교인의 교회와 사원 그리고 개인 주택들은 습격의 대상이 되었고, 그들의 애국심이 의심을 받았다. 그러나 살만 루시디(Salman Rushdie) 사건과 걸프 전쟁 직후의 소동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상황이 좋아지고 있다고 느끼고 있다. 1992년 정부가 신분 증명서에 종교를 명시하도록 하자, 이 명백한 차별 대우에 대한 대규모 저항이 일어나 그리스도인과 힌두교인 그리고 무슬림이 연대한 단식 농성, 항의 기자 회견, 연좌 농성 등이 계속되었고, 결국 정부는 이 정책을 포기하였다. 일반 대중에 의해 시작된 이 저항은 그들의 단결력을 과시하였고, 많은 무슬림들의 지지를 받았다. 또한 대중 매체가 효율적으로 이용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소수 종파들은 정치적인 각성과 함께 권력의 본질을 직접 체험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과 소수 종파의 신자들은 사회적 차별 대우에 지속적으로 직면하고 있다. 특히 1997년 2월 5일과 6일에 물탄 근방의 칸왈(Khanwal)에서 그리스도인 거주지에 대한 잔혹한 공격이 가해져 교회와 개인 주택들이 불타 버렸다. 정부 조사의 결과는 공표되지 않았지만, 정치적 목적을 위해 종교가 이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 여파는 여러 측면에서 중요성을 내포한다. 즉 파키스탄 정부는 비등하는 국제 여론에 당황하였고, 많은 무슬림들이 자신의 이웃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사과하였으며, 공식 · 비공식 대표단들이 그 지역을 방문하였다. 그 대표단들 중 하나는 무슬림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더럽혀진 교회의 바닥을 청소하고 갑자기 집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였다.
현황 : 2004년 현재 파키스탄의 신자수는 전체 인구의 0.85%인 1,255,000명이며, 대교구 2, 교구 4, 지목구 1, 본당 117개에, 대주교 2, 주교 6, 신부 282(교구 소속 142, 수도회 소속 140), 종신 부제 2, 수사 44, 수녀 703명이 있다. (→ 방글라데시 ; 인도)
※ 참고문헌  The Catholic Church in Pakistan Directory, Islamabad, 1998/ B. Mendes, Looking Back at the ID Card Issue, Focus Supplement no. 1, 1993/ Christophe Jaffrelot, Pakistan: Nationalism without a Nation, Paris, Zed Books, 2002/ Ian Talbot, Pakistan: A Modern History, New York, Palgrave Macmillan, 1999/ Lawrence Ziring, Pakistan: At Crosscurrent of History, Dawson, Oneworld Publications, 2004/ 2004 Catholic Almanac, Our Sunday Visitor Publishing Division, p. 316. [高弘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