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와 성사, 사목과 규율 등 교회 생활 전반에 관한 지도 지침서로 한국 주교 회의의 권위와 명의로 공포하여 의무적으로 실시하는 한국 지역 교회의 법령집.
1995년에 발표된 지도서에는 '사목 지침서'라는 제목이 붙여졌지만 그 내용은 사목에 국한되지 않고 교회 생활 전반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이전의 모든 지도서가 《한국 교회 지도서》로 불린 것처럼 그렇게 부르는 것이 옳은 것 같다. 또 지침서의 어원인 '디렉토르'(Director)를 '지침자'가 아니라 '지도자'로 번역하는 것처럼 '디렉토리움'(Directorium) 역시 '지도서'로 번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므로 '사목 지침서'는 전통과 관례에 따라 '《한국 교회 지도서》', 그 이전에 발표된 지도서들은 한국 교계 제도의 설립 이전에 발표된 것이기에 '교회'가 아니라 '선교지'(宣敎地, Missio)라고 해야 한다. 그래서 이전의 모든 지도서들은 '한국 선교지 지도서'(Directorium Missionis[Missionum] Coreae)라고 지칭되었던 것이다.
《한국 교회 지도서》는 1857년에 시작하여 1887년, 1932년, 1995년 세 차례 개정 · 간행되었다. 물론 1914년과 1923년에도 지도서가 간행되었으나 그것들은 한국 교회 전체의 지도서가 아니고 교구에 국한된 지도서였다. 지도서에 수록된 한국 교회의 특별 법규들은 시노드의 의결을 거쳐 입법화되었기 때문에 《한국 교회 지도서》의 역사는 한국 교회 시노드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선교지나 교구가 하나일 경우에는 시노드의 개최가 반드시 의무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매번 개최되지는 않았으며, 실제로 한국 교회에서 시노드는 1857년과 1931년 두 차례 개최되었을 뿐이다. 1868년에도 2년 전의 병인박해로 인해 만주 지역으로 피신한 선교사들이 시노드를 개회하였으나 교구장이 공석이었기에 실제로는 소시노드에 그쳤고, 1984년의 사목 회의도 한국 교회 설립 200주년을 기념한 교회 회의였지 10년 후에 발표된 지도서의 공포를 목적으로 한 교회 회의는 아니었다. 하지만 비록 시노드를 거치지 않았더라도 신부들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적어도 사전에 입법 초안을 회람하도록 하거나, 신부들이 모이는 연례 피정 등의 기회에 토의를 거쳐 동의를 구하는 것이 상례였을 것이다.
I. 1857년의 시노드 및 최초의 《한국 교회 지도서》
[한국 최초의 시노드] 《한국 교회 지도서》 편찬을 계획한 조선교구의 제4대 교구장인 베르뇌(S.F. Berneux, 張敬一) 주교는 그 안에 수록할 한국 지역 교회의 특별 법규들을 심의 결의하기 위해 1857년 3월 25일 다블뤼 (M.N.A. Daveluy, 安敦伊) 신부의 주교 서품식을 계기로 성직자 회의를 소집하였다. 베르뇌 주교를 비롯하여 부주교로 서품된 다블뤼 주교와 프랑스 선교사들 및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 등 5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에서 개최된 이 회의는 최초의 한국 교회 시노드로서 3월 26~28일까지 3일 동안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성영회(聖嬰會)의 기금으로 고아와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어 키우게 될 사업의 운영 규정을 비롯하여 신자들의 성사 생활에 관한 규정과 행동 지침 등 많은 의제들을 심의하고 결의하였다. 베르뇌 주교는 여기에서 의결된 규정들을 기초로 하여 신자들을 위한 한글 지도서는 1857년 8월 2일에, 성직자들을 위한 사목 서한은 이듬해 4월에 반포하고 그 실시를 명하였다.
[신자 지도서] 한국 교회 최초의 신자 지도서는 베르뇌 주교가 모든 교우들에게 돌려 보라고 한 《장주교윤시제우서》(張主教輪示諸友書)이다.
베르뇌 주교는 서론에서 조선에 입국하여 신자들의 영혼을 구하는 데 전념해 왔다고 전제한 후 신자들이 미사와 모든 전례 및 평상시에 지켜야 할 행동 지침, 남녀 간에 조심해야 할 사항 등을 제시하였다. 이어 '도리'(道理)에 관해 언급하면서, 교리를 모르는 사람은 구원될 수 없으니 노소(老少)를 막론하고 교리 공부에 힘쓰라고 지시하면서 자식을 가르치는 것이 부모의 본분이라고 강조하였다. '성사' 편에서는 성품성사를 제외한 여섯 가지 성사를 설명하면서, 이단(異端)의 물건을 지닌 자는 고해성사를 받을 수 없으며 공소에도 오지 못한다고 하여 이단을 철저히 경계하였다. 또한 혼인에 있어서는 자녀의 의사를 존중할 것과 과부의 재혼을 권고하였다. 부록에 수록된, 고아와 버려진 아이를 거두어 양육하는 성영회 사업에 관하여서는 그 운영 규정과 서식들을 소개하고 있다.
사목 서한 형식으로 공포된 이 지도서는 당시 교회에 인쇄 시설이 없었기에 간행되지는 못하였지만 윤시 형식으로 지시하였으므로 매우 널리 보급될 수 있었다. 실제로 지도서 원본을 먼저 공주(公州)에 보내 필사본을 만들어 각 공소에 전하게 하고 이어 전라도로 원본을 전하여 역시 필사본으로 모든 공소에 돌려 보게 하였기 때문에 오늘날 많은 필사본들이 전해지고 있다.
[성직자를 위한 라틴어 지도서] 베르뇌 주교는 성직자들에게는 이미 5월 6일자 서한을 통해 성영회 사업 규정과 규식을 보냈으나, 지도서는 1년 후인 1858년에 사목 서한을 통해 알렸다. 이렇게 시노드 결정의 공포가 1년이나 지연된 이유를 베르뇌 주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시노드가 끝난 직후부터 그는 성직자들에게도 공동의 규정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교우들의 지도서가 아무리 신성 불가침한 것이라 할지라도 목자인 신부들의 성성(聖性)이 입증되지 않으면, 신자들에게 크게 유익하지 않을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성직자 지도서로서 어떤 것이 적합한 지 1년 동안 자료를 수집하면서 심사숙고한 끝에 중국의 사천(四川) 시노드 규정집보다 더 낫고 안전하게 따를 수 있는 규정은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에 그는 서울 시노드의 결정 사항을 제외한 그 밖의 것은 사천 시노드 규정들을 택하기로 결정하고, 1858년 4월 성직자들에게 보내는 사목 서한을 통하여 서울의 시노드에서 결정된 사항과 함께 사천 시노드의 규정들을 공포하고 그 준수를 지시한 것이다. 그리고 사천 시노드 규정에 대해서는 시노드 자체에서 결정된 것만이 아니라, 부록의 주석과 추가 사항에 포함되어 있는 결정들까지도 성직자들의 생활과 활동의 기초로 삼도록 지시하였다.
베르뇌 주교는 1857년 11월 18일 포교성(현 인류 복음화성) 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사천 시노드 규정에 "한국의 선교사들은 가옥과 부동산을 취득해서는 안 되고 또 그들의 생계에 필요하지 않은 교회 헌금의 일부를 교구 금고에 넘겨야 한다"라는 두 가지 결정을 추가하여 포교성 장관의 승인을 얻으려 하였다. 그러나 장관은 1858년 7월 24일의 회신에서 베르뇌 주교가 한국의 성직자들에게 사천 시노드 규정의 준수를 지시한 것에 대해서는 만족을 표하였으나, 그 두 가지 결정은 승인하지 않았다.
[1868년 만주에서 개최한 시노드] 1866년 병인박해로 12명의 선교사 중 무려 9명이 순교하였으나 페롱(S. Féron, 權), 칼레(A.-N. Calais, 姜良), 리델(F.-C. Ridel, 李福明) 등 3명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페롱 신부는 귀국하였고 리델 신부의 책임하에 칼레 신부와 새로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입국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던 블랑(M. Blanc, 白圭三), 리샤르(P. Richard, 蔡), 마르티노(A. Martineau, 南) 신부 등은 만주의 차쿠(岔溝)에 머물고 있었다. 그들은 한국에 입국할 때까지 초대 요동 대목구장인 베롤(E. Verrolles, 方若望) 주교의 청에 따라 차쿠 본당을 관리하고 그곳 중국 교우들을 사목하며 정착해 있었다. 그들은 1868년 12월 차쿠에서 자칭 '작은 시노드'를 개최하고 공동 재산에 관한 규정을 비롯하여 박해 때와 평상시의 사목 활동에서 신자들에게 취해야 할 처신, 배교자들에게 속죄로 줄 보속, 혼인 장애와 미신에 관한 규정 등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이 결의들은 교구장의 승인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실제로 공포 · 시행되지 못하였다. 실상 1866년 박해로 베르뇌 주교가 순교하였고 그를 계승한 다블뤼 주교도 곧이어 순교함으로써, 제6대 교구장으로 리델 주교가 임명되는 1869년까지 3년 동안 교구장직이 공석이었다.
II. 두 번째 《한국 교회 지도서》
[내 용] 1887년에 공포 · 간행된 《한국 교회의 관례》(Coutumier de la Mission de Corée)는 한국 교회의 두 번째 지도서이다. 내용은 제1장 성사, 제2장 상호 간의 행동 지침, 제3장 성사 집행 그리고 부록으로 1803년의 사천 시노드 규정집과 비슷하게 구성되어 있다. 제7대 교구장인 블랑 주교는 1887년 9월 21일자 사목 서한을 통해 이 관례법을 공포하고 동시에 그 준수를 지시하면서 이 지도서의 규정이나 상호 관계에서의 행동 지침들은 새로운 법규가 아니고 선임자들이 수행한 행동 노선의 재현일 뿐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뜻밖에 일어난 상황 변화로 불가피해진 몇 가지 특수 사항을 추가하였는데, 이 추가 사항에 보다 특별히 유의하라고 요망하였다. 추가된 사항은 네 가지로 첫째, 모든 회장을 교사로 결정하였다. 구체적으로 공소 회장은 매 주일 오전에 첫 영성체를 하지 않았거나 견진을 받지 않은 공소의 모든 소년들을 모아 그들에게 교리 문답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따라서 각 선교사는 지도서를 받는대로 공소 회장들이 주일마다 그렇게 실행하도록 주교의 지시를 알리는 편지를 써 보내도록 하였다. 필요하고도 긴급한 이 새로운 제도가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그 실천에 모든 정성을 기울이도록 하였으며, 선교사들의 열성을 기대한다고 하였다. 둘째, 총 신자수를 보다 정확하게 계산하기 위해 몇 가지 시정할 점을 제시하였다. 셋째, 한불 조약이 체결된 후 선교사들이 교우들에게 지켜야 할 예법이 변화하였을 것이니 그에 맞는 예법을 지키도록 해야 한다. 넷째, 부록에 한불조약을 발췌해 삽입한 의도는 이 조약이 보장하는 권리와 특권을 알려 주고 동시에 넘어서는 안 될 일정한 한계들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이다.
지도서의 부록에는 사천 시노드와 조선 최초의 시노드 결과를 공포한 1858년 4월의 베르뇌 주교의 사목 서한, 1857년 3월 시노드에서 결의한 성영회 사업 규정을 성직자들에게 공포한 베르뇌 주교의 그해 5월 6일자 서한, 한국 교회에서 평신도들에게 허락된 예수 성심회, 성의회, 매괴회, 성모 성심회에 가입할 때의 기도문, 한국어 모음과 자음의 유럽어 표기법, 한국에서의 월별 일출과 일몰 시간표, 서울에서 1886년 6월 4일에 조인되고 1887년 5월 30일에 비준된 한불 조약의 발췌문 등이 수록되었다.
이 지도서에 1857년의 시노드 및 지도서들과 관련된 문서들이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시노드에서 결의된 법규들도 관습법으로 수록되었을 것이 확실하다. 실제로 1857년의 신자 지도서에서 많은 것이 전재(轉載)되었다. 즉 유아 세례의 경우 "신부가 없을 때 아이를 낳았다면 세례는 회장이 직접 주어야 하지만 두 사람의 증인이 있어야 하며, 부모는 아이가 태어난 지 3일 안에 회장에게 청하는 것이 의무이고 만일 8일을 넘기면 엄한 벌을 받을 것이다"라는 내용과 종부성사를 주어야 한다면 "현재 있는 곳에서 오십 리쯤 떨어져 있는 곳에서 종부를 청하면 가고, 그 이상인 경우에는 가지 못한다"라는 내용이 있다. 또한 신자들의 행동 지침에서 "미사와 모든 예절에 참례할 때 모든 교우들은 버선을 신고 옷을 단정히 하되 남자 교우는 망건을 쓰고 소창옷을 입으며 여자 교우는 머리에 넓은 수건을 쓸 것이다." 혼인의 경우에서 "교회법에 따라 동정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은 스스로 결단하지 못하는 법이니 마땅히 신부와 자세히 의논해야 한다", "과부된 자는 그 풍속을 따르지 말고, 원의대로 재가하기를 권하고 권하노라" 등이 뚜렷한 사례들이다.
반면 1868년의 시노드 규정들이 수록된 흔적은 없다. 앞서 지적한 대로 이 시노드가 교구장의 주재하에 열리지도 않았고 그 승인을 받을 수도 없었으며, 더구나 교황청 포교성의 승인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한국 교회의 관례》는 공포에 그치지 않고 간행된 최초의 지도서이다.
[대구교구와 서울교구 지도서] 1857년과 1887년에 공포된 지도서들은 한국 선교지에 대목구가 하나 밖에 없을 때 발표된 것이기에 사실상 한국 교회 전체의 지도서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1911년에 조선 대목구에서 대구 대목구가 분할 · 독립되고 기존의 조선 대목구는 그 이름을 바꾸어 서울 대목구가 됨으로써 한국 교회는 두 개의 교구로 나뉘어졌다. 그러나 대구 대목구도 서울과 마찬가지로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되었다.
대구 대목구의 초대 교구장인 드망즈(F. Demange, 安世華) 주교는 1912년에 교구 차원의 지도서 간행을 계획하고, 직접 작성한 초안을 교구 소속 모든 성직자들에게 보내 검토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후 9회에 걸친 성직자 회의에서 본문을 완성시켜 1912년에 《대구교구 지도서》(Directorium Missionis Taikou)라는 이름으로 공포하고 1914년에 간행하였다. 이에 따라 서울 대목구도 교구 지도서를 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917년에 새 교회법이 공포되자 서울 대목구장 뮈텔(G.-C.-M. Mutel, 閔德孝) 주교는 교구 지도서를 간행하기로 하고 그 편찬을 1920년에 서울의 부주교로 임명된 드브레(E.A.J. Devred, 俞世竣) 주교에게 위촉하였다. 드브레 주교는 1921년에 초안 작성을 끝내고 교구 사제들에게 검토하게 한 후 1922년 교구 성직자 회의에서 토의를 거쳐 동의를 받았으며, 교구장의 감수와 공포를 거쳐 1923년에 《서울교구 지도서》(Directorium Missionis de Seoul)를 간행하였다.
《대구교구 지도서》가 이전의 지도서처럼 한국 지역 교회의 법규만을 수록한 반면, 《서울교구 지도서》는 새 교회법의 내용을 상세히 알려야 한다고 생각한 탓인지 새 교회법의 수록에 역점을 두었다. 따라서 한국 지역 교회 법규들은 단지 보편 교회법의 세칙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취급한 듯하다. 예컨대 《대구교구 지도서》는 견진성사의 대부모가 세례 때의 대부모와 같아서는 안 되며 다른 사람이어야 한다고 간단히 언급한 반면, 《서울교구 지도서》는 1917년 교회법 795조에 의거해 그 자격자로 견진을 받은 자, 착실한 신자 등의 조건들을 장황하게 나열하였다. 그리고 세칙으로 "신부는 주교의 허락 없이, 수도자는 장상의 허락 없이 대부모가 될 수 없다"라는 한국 교회의 관례를 덧붙였다. 그러나 그것은 관례로 이어받은 것이지 반복할 것은 아니며, 새로운 것은 교회법이지 그것을 되풀이한 지도서도 함께 새 것이 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서울교구 지도서》는 거의 매 조항마다 먼저 보편 교회법을 참조시키거나 조항 전체를 또 하나의 조항으로 되풀이하기 때문에 조항수가 무려 699조로 크게 늘어났다. 《대구교구 지도서》의 조항수가 불과 291조인 것과 매우 비교된다.
그렇지만 《서울교구 지도서》는 1857년의 선례를 따라 신자용 한글 지도서를 동시에 공포 · 실시한 점에서는 매우 바람직한 모범을 보였다. 뮈텔 주교에게 편찬을 위촉받은 르 장드르(L.-G.A.A. Le Gendre, 崔昌根) 신부는 라틴어로 된 《서울교구 지도서》에서 신자들도, 특히 회장들이 알아야 할 것을 발췌하여 《회장직분》(會長職分, 1923)을 간행하였다. 회장 제도는 모방(P.P. Maubant, 羅伯多祿) 신부가 1837년, 신부의 수는 적고 공소는 늘어남에 따라 그 해결책으로 유능하고 착실한 평신도를 공소에 보내 유아 대세와 혼배를 대행토록 한 것이 기원이었다. 1857년에 베르뇌 주교는 이 제도를 지도서에 도입하였고, 블랑 주교가 자신의 지도서에서 회장의 중재자 역할을 부각시킨 이래 회장 제도는 관례로 지속되고 보완되면서 《회장직분》에서는 거의 완전한 제도로 정착되었다. 이렇게 비록 관례일지라도 토착화의 일환으로 계속 보완해 나감으로써 묵은 관례임에도 폐지되지 않고 새로워진 관례로써 지속될 수 있었으나, 한국의 모든 고유법은 먼저 시노드의 의결을 거쳐야 하였고, 의결된 사항 중에 토착화에 관한 것은 극히 드물었다.
Ⅲ. 1931년의 한국 지역 시노드와 지도서
[시노드의 준비 과정] 한국에서 처음으로 시노드가 개최된 것은 1857년이었다. 시노드가 개최되지 않은 가장 중요한 원인은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시노드를 단독으로 개최할 권한이 한국 교회에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교성은 한국 주교들을 일본 시노드에 참석시켰고, 그것이 여의치 않자 중국 시노드에 참석시키려 하다가 1929년에야 비로소 단독으로 시노드를 개최할 권한을 한국 교회에 주었다. 이에 한국 교회는 조선 대목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시노드를 개최할 수 있었고 이것이 1857년에 이은 두 번째 시노드였다. 그러나 이 시노드 개최까지는 48년간의 긴 전사가 있으며 이는 시기의 특징에 따라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제1단계(1884~1894) : 포교성은 1884년에 일본의 두 대목구와 조선 대목구를 합쳐 하나의 시노드 지역으로 결정하고, 5년마다 정기적으로 시노드를 개최하라는 교령을 발표하였다. 그래서 일본 천주교회는 구교우 발견 25주년을 기념하여 1890년 2월에 일본과 한국 지역 시노드(Synodus regionalis Japoniae et Coreae)를 남부 대목구의 주교좌인 나가사키(長崎)에서 개최한다고 발표하였다. 조선 대목구장인 블랑 주교가 시노드에 참석해야 하였으나, 1890년 2월 21일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부대목인 두세(C.-E. Doucet, 丁加彌) 신부가 시노드에 파견되었다. 두세 신부는 시노드가 이미 시작된 후에 나가사키에 도착하였으나 시노드가 끝날 때까지 참석하였다. 시노드는 폐회에 앞서 규정에 따라 5년 후인 1895년에 제2차 일본 · 한국 지역 시노드를 도쿄(東京)에서 소집하기로 결정하였다.
제2단계(1894~1919) : 제2차 일본 · 한국 지역 시노드를 앞두고 두 가지 사건이 발생하였다. 우선 1891년에 일본의 교계 제도가 설립되었다. 그 결과 일본은 지역이 아니라 교회 관구가 되었고, 따라서 시노드의 명칭도 제1차 동경 관구 시노드로 바꾸어야 하였다. 또 다른 사건은 1894년에 일어난 조선 대목구장 뮈텔 주교의 간섭이었다. 그는 1894년 초에 포교성에 편지를 보내, 한국의 선교 조건들이 일본보다 중국에 더 가깝다는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한국을 중국 시노드 그룹에 배당해 주도록 건의하였다. 포교성은 즉시 뮈텔 주교의 건의를 받아들여 한국을 일본에서 분리해 중국 지역 제1그룹에 포함시키기로 결정하고 그 결정을 1894년 5월 18일자 교령으로 확정하였다. 실제로 제1차 동경 관구 시노드는 조선 대목구장인 뮈텔 주교가 참석하지 않은 채 일본의 주교들만 참석하여 1895년 4월 말부터 5월 초까지 개최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회의에서는 제2차 관구 시노드를 5년 후인 1900년에 도쿄에서 다시 개최하기로 결정하고 해산하였다. 그러나 이 시노드는 일본 국내외의 불리한 여건, 예컨대 1900년 외국인 선교사들의 체류 허가에 관한 새 법령이 공포되자 주교들이 모일 수 없었고, 1904년에는 노일전쟁, 1906년에는 동경 대주교의 사망, 1914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등으로 계속 연기되었다. 그런데 1919년에 교회 조직상의 큰 변화가 일어났다. 즉 교황 사절이 도쿄에 상주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한국이 주일 교황 사절 관할에 속하게 되는 중대한 변화였다.
제3단계(1919~1929) : 제2대 주일 교황 사절인 자르디니(M. Giardini) 대주교는 한국 교회의 사정, 특히 동경 관구 시노드에 한국의 주교들을 참석시키거나 한국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시노드를 개최할 수 있는지를 검토하면서 재임 기간(1921~1931) 동안 매우 적극적으로 한국 교회의 사정에 개입하였다. 자르디니는 동경에 부임한 후 우선 28년간 지연된 제2차 동경 관구 시노드부터 빨리 해결하려 하였고, 이 회의를 1924년에 소집토록 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이 시노드에 한국 주교들을 참석시키기 위해 한국의 주교들과 서신 교환을 하거나 직접 방한하여 그들을 만나는 등 바쁘게 움직였다.
동경 관구 시노드에 한국의 주교들을 참석시키는 문제는 쉬워 보이지 않았다. 그는 1894년에 한국 교회가 일본의 지역 교회 그룹에서 분리되어 중국의 제1시노드 그룹에 배정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조치는 실제로 그 당시까지 아무런 결과도 가져오지 못하였고, 더구나 실행된 적도 없었다. 또한 정치적 상황 때문에 한국의 주교들이 중국의 지역 시노드에 초대된 적도 없었다. 일본이 1910년에 조선을 합병하였을 때 교황청은 1894년 이래 존속된 결정을 관철시키려 할 필요가 없었고, 오히려 한국 교회를 일본 시노드에 참석하도록 초대하는 것이 좀 더 적합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자르디니는 한국 주교들의 참석 문제에 관하여 뮈텔 주교와 상의하였고, 뮈텔 주교는 다른 2명의 주교와 상의한 후 1922년 12월 20일 자르디니에게 회답하였다. 뮈텔 주교는 자신의 보좌 주교인 드브레 주교나 원산 대목구의 사우어(B. Sauer, 辛上院) 주교와 마찬가지로 한국 교회가 중국이나 일본에 배당되어서는 안 되고 '하나의 특별 시노드 그룹을 형성해야 하지만, 그것이 일본 시노드로 대표되는 것을 막지는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다. 다만 원산 대목구의 관할 지역 일부가 중국에 속해 있고, 또 대부분 중국인이 사는 두 지역이 만주에 속해 있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반면 대구 대목구장인 드망즈 주교는, 조선은 일본과 하나의 시노드 그룹을 구성해야 하지만 조선에 관한 문제만은 시노드에서 따로 다루도록 제의하였다.
자르디니는 1923년 1월 포교성 장관인 롯숨(W. van Rossum) 추기경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국에 교계 제도가 설립될 경우 양자 택일을 하도록 하자고 제의하였다. 롯숨 추기경은 1923년 3월 5일자 회답에서 동경 관구 시노드에 한국의 주교들이 참여하는 문제를 언급하면서, 비록 정치적으로 한국이 일본 정부 및 주일 교황 사절에게 속해 있을지라도 한국 교회가 하나의 고유한 지구를 이루고 있으므로 한국의 주교들은 그들 고유의 관구 시노드를 개최하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 시기는 한국의 새 선교지가 메리놀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에게 위임되면 즉시 실행될 수 있겠지만, 아마 1925년 전에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의 소견을 말하였다. 그러나 자르디니가 제안한 교계 제도 설립 문제에 관해서는 시기 상조라고 대답하였다.
자르디니는 1924년 9월에 처음으로 한국에 머물면서 3명의 대목구장을 모두 방문하고 주교들과 한국 관구 공의회 소집에 관하여 상의하였다. 주교들의 의견은 메리놀 선교지가 확립되어 평탄하게 시작될 때까지 몇 년 더 기다리자는 것이었고, 특히 당시 주교들 중에는 어느 누구도 공의회 소집의 필요성이나 유익성을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자르디니는 그때 한국의 선교 상황에 대한 완전한 개관을 얻었고, 외국인과 한국인 신부들의 열의를 보고 한국의 복음화의 전망이 매우 밝다고 판단하였으며, 특히 평신도들의 선교에 대한 기여는 그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위임한 평양 지목구가 1927년 3월 설정된 지 1년 후, 관구 시노드의 개최 준비를 서둘러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 주교들은 1928년 10월에 예비 토의를 가졌고, 1929년 5월에는 공의회를 소집할 생각을 하였다. 이때 주교들은 교황 사절에게 공의회 의장직을 맡아 주도록 간청하였다. 이 문제에 대해 자르디니는 1928년 1월 18일 포교성에 보고하였다. 롯숨 추기경은 자르디니에게 공의회 의장직을 위탁하는 한국 주교들의 제의가 5월 21일 교황 알현에서 승인되었고, 또 그에게 필요한 모든 권한을 수여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5월 25일자로 보냈다. 그러나 공의회는 사정에 따라 뒤로 연기되었다. 자르디니는 주교들과 새 일정을 정하였고, 당시 서울에서 조선 대목구 설정 100주년을 기념하기로 되어 있던 1931년 9월을 택하였다.
[한국 지역 시노드] 명칭과 목적 : 지금까지 이 회의를 '한국 공의회'라고 하였지만, 이 회의의 공식 명칭은 '한국 지역 시노드'(Synodus Regionalis Coreae)이다. 그러나 의사록이나 의결집 등의 시노드 문헌에서는 항상 '한국 지역 공의회'(Concilium Regionale Coreae)로 기록하였기에 오늘날까지 일반적으로 공의회로 간주되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당시 시노드에 참석한 교부들 중에도 있었다. 그들 역시 자신이 없었던 탓인지 때로는 시노드, 때로는 공의회로 용어를 혼용하고 있다. 예컨대 이 시노드 후에 발표된 공동 지도서에는 "한국 지역 시노드의 명에 의하여 간행된 지도서"(Diretorium jussu Synodus Regionalis Coreae)라는 표제를 붙여 놓고, 본문에서는 항상 공의회로 불렀다. 그리고 다섯 교구장 공동 명의로 발표한 공동 지도서 반포령에서도 "한국 지역 시노드의 주교들"(Ordinarii Regionalis synodalis Coreae)이라고 시작하고 본문에서는 다시 공의회로 표기하였다. 뮈텔 주교도 시노드 개최 기간 동안의 일기에서 공의회라는 용어를 1회, 시노드라는 용어는 5회 사용하는 등 혼용하였다. 1980년에 발표된 메츨러(Josef Metzler)의 《1570~1931년의 한 · 중 · 일 시노드》(Die Synoden in China, Japan und Korea 1570~1931)에서 비로소 1931년의 회의가 공의회가 아니라 시노드였음이 인류 복음화성 고문서고의 원사료에 근거하여 명확히 밝혀졌다. 이 시노드는 1931년 조선 대목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기념 행사로 개최되었고, 또 그 주된 목적은 《한국 교회 공동 지도서》(Directorium commune Missionum Coreae)의 간행이었다(규범 2조).
준비에서 소집까지 : 1931년 3월 27일 한국의 주교들은 대구에서 시노드 준비를 위한 주교 회의를 가졌다. 대구 대목구장인 드망즈 주교의 사회로 개최된 이 주교 회의에서 시노드의 의안들이 작성되었다. 4월 13일에 제3대 주일 교황 사절인 무니(E.F. Mooney) 대주교는 포교성 장관에게 시노드 의장직을 명확히 위임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롯숨 추기경은 6월 17일자 편지에서 포교성의 차관 살로티 대주교가 6월 8일 알현에서 교황에게 그 사실을 보고하였고, 교황 비오 11세(1922~1939)는 새 시노드를 승인하고 무니를 의장에 임명하였다고 회답하였다.
이에 무니는 1931년 7월 31일, 성령 강림 후 제16주일인 9월 13일에 서울의 주교좌 성당에서 한국 지역 시노드를 개최한다고 발표하였다. '의사록'에 의하면 이 시노드에 소집된 사람들은 총 23명이다. 즉 시노드의 의장인 무니 대주교와 대목구장 및 지목구장들, 서울의 뮈텔 대주교, 대구의 드망즈 주교, 원산의 사우어 주교, 서울의 라리보(A.J. Larribeau, 元亨根) 주교, 연길 지목구장인 브레허(T. Breher, 白化東) 신부, 평양 지목구장인 모리스(J.E. Morris, 睦怡世) 몬시뇰 등 7명이었다. 또한 고문 신학자 16명이 참석하였는데,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으로 대구 부대목인 무세(G. Mousset, 文濟萬), 용산 신학교장 기낭(P. Guinand, 陳普安), 줄리앙(M. Julien, 權裕良), 폴리(Polly, 沈應榮) 신부 등 4명, 베네딕도회 소속의 원산 부대목 로트(L. Roth, 洪泰華), 연길 부지목 랍(K. Rapp, 朴), 히머(K. Hiemer, 任竭忠), 차일라이스(V. Zeileis, 徐相烈), 담(F. Damm, 卓世榮) 신부 등 5명, 메리놀 외방전교회 소속의 클리어리(P.H. Cleary, 吉), 치셤(D. Chisholm), 콜먼(W. Coleman, 高) 신부 등 3명, 한국인 신부로는 전라도 감목 대리인 김양홍(金洋洪, 스테파노)과 이기준(李起俊, 토마스) 신부 등 2명, 주일 교황 사절의 비서인 허리(J. Hurley) 신부와 교회법 고문 알뱅(L. Alvin) 신부 등이었다.
예비 회의(9.12) : 토요일인 이날 오후 4시에, 전날 저녁 서울역에 도착한 무니를 위시하여 합법적인 이유로 참석하지 못한 2명을 제외한 모든 시노드 참석자들이 임시로 개조한 서울 주교관의 시노드 홀에 모였다. 의장은 교부들 및 고문들과 인사를 나누고, 교황과 포교성 장관에게 보내는 인사 전보 본문을 상의하였다. 이어 대구에서 드망즈 주교의 사회로 개최되었던 준비 주교 회의에서 주교들이 준비한 의안들을 승인하였다. 그 첫 의안이 진행 방식에 관한 소책자와 함께 의장에게 전달되었다. 첫 의안을 재심하고 또 총회를 위해 최근 자료들을 준비 할 4개의 위원회가 결정되었고, 여기에 시노드의 권위로 간행될 한국의 공통 지도서를 편집하기 위한 다섯 번째 위원회가 추가되었다. 교리 위원회(Commissio de Doctrina)의 위원장은 브레허 신부가 맡았고, 위원으로는 랍, 기낭, 김양홍 신부가 임명되었다. 가톨릭 운동 위원회(Commissio de Actione Catholica)는 위원장에 모리스 몬시뇰, 위원으로는 폴리, 담, 콜먼 신부가 임명되었고, 성직자 및 평신도 규율 위원회(Commissio de disciplina cleri et populi)의 위원장에 사우어 주교, 위원에 로트, 치셤, 이기준 신부가, 세속 재산 위원회(Commissio de bonis temporalibus)의 위원장에는 라리보 주교, 위원으로는 무세, 클리어리, 히머 신부가 결정되었다. 그리고 지도서 준비 위원회(Commissio de Directorio praeparando)의 위원장에는 드망즈 주교, 위원으로는 줄리앙, 차일라이스 신부가 임명되었다. 규칙적으로 총회는 오전에, 다섯 위원회는 오후에 개최하도록 결의되었다.
마지막으로 시노드를 개막하는 장엄한 제1회기를 다음날 9시에 주교좌 성당에서 개최할 것임을 알렸다. 또한 시노드에서 담당한 직책(officium)에 대한 승인과 그 회기에서 공표할 다른 결의들도 승인하고 모든 참석자들이 지켜야 할 비밀 준수의 선서를 의장이 큰 소리로 낭독하였다. 각 직책으로는 의장에 무니, 사무총장(secretarius generalis)에 드망즈, 제안자와 논쟁 및 변명 판사에 로트와 클리어리, 사무총장의 보좌 비서(assistens secretarius)에 줄리앙, 낭독자는 이기준과 콜먼, 사무총장의 보좌 비서 겸 서기는 알뱅, 기록 증인으로 줄리앙과 허리, 예식에 대한 책임으로는 기낭 신부가 지명되었다.
본회의(9.13~26) : ① 제1회기(9.13~21) : 9월 13일 서울 대목구의 주교좌 성당에서 제1회기가 장엄하게 개회되었다. 9시에 교부들은 고문들과 함께 주교관 시노드 홀에 모여 제의를 입고 많은 신자들의 호위를 받으며 행렬을 지어 성당으로 입장하였다. 성령 허원 주교 대례 미사에서 의장은 라틴어로 공의회에 대하여 강론을 하였고, 이를 라리보 주교가 한국어로 통역하였다. 이어 모든 것이 '시노드의 순서'에 따라 진행되었다. 끝으로 시노드의 개회, 시노드에서의 생활 태도, 선입견을 갖지 말 것, 시노드장을 떠나지 말 것, 신앙 선서 등을 한 후 모든 참석자들이 신앙 고백을 하고 교황 강복을 받은 후 시노드홀로 돌아갔다.
앞서 결정한 규정에 따라 의장으로부터 임명된 위원회들은 9월 14~21일까지의 특별 회의에서 교부들의 승인을 얻기 위해 제출할 규정들을 작성하였다. 9월 15일 오전 9시에 첫 총회가 열렸다. 여기서 모든 시노드 참석자들은 교황과 포교성 장관으로부터 축하 전보를 받았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준비위원회에서 제출한 규정의 심의를 시작하였다. 심의는 이 총회와 9월 25일까지 거의 매일 개최된 총회에서 고문들의 의견을 듣고, 교부들의 표결에 붙여졌다. 그리고 승인된 내용들은 시노드의 의결 사항이 되었다.
② 제2회기(9.22~25) : 9월 22일에도 장엄한 미사로 제2회기를 개회하였다. 이 미사는 관례대로 이미 세상을 떠난 한국의 교구장 주교들을 위한 연창미사였으며 모든 교부들과 고문들이 참석하였다. 미사는 뮈텔 대주교가 집전하였고, 사도 예절은 드망즈 주교가 하였다.
③ 제3회기(9.26) : 마지막 회기였던 9월 26일은 한국 순교 복자 축일이었기에, 축일 미사로 성대하게 개회하였다. 오전 9시에 모든 참석자들은 장엄한 행렬을 지어 주교좌 성당에 입장하였다. 성당에는 신자들이 모여 있었는데, 이 미사의 주례는 의장이 하였고, 미사 중 강론은 신인식(申仁植, 바오로) 신부가 하였다. 성찬 전례를 한 후 결의 사항이 낭독되고 이어 의장과 교부들이 제대 서간편으로 올라가 승인된 결의에 직접 서명하였다. 서명이 끝나자 시노드 마감 교령이 낭독되었다. 그리고 감사가인 <테 데움>, 예식적인 환호, 평화 인사의 교환, 교황 강복이 차례로 이어졌으며 그동안 신자들은 <복자 찬가>를 불렀다.
시노드의 의결 사항 74조는 전례와 사목 등 많은 문제를 다루었으나, 로마에서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주장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루지 않은 중요한 문제 하나가 빠져 있었다. 그것은 교회의 지도를 점차적으로 한국인 성직자에게 넘기는 문제였다. 주교들은 지도서 공동 반포 문에서 이 문제에 관하여 "한국인 성직자에게 위임된 교구의 설정이 멀지 않았고 이미 그 서광이 비치고 있다"라고 간단히 언급하였지, 현지인 지도력의 양성이 모든 선교지 교회 시노드의 큰 관심사라는 것을 뚜렷하게 드러내지는 않았다. 한국은 1931년에 대구 대목구에 속한 전라도를 감목 대리구로 설정하고 그것을 한국인에게 넘길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국 교회 공동 지도서] 구조 : 이 지도서의 74조 중 총칙적인 성격의 처음 3개 조항만 맨 앞에 놓고 나머지 71조는 4편으로 분류하였다. 즉 "제1조 외국인이든 한국인이든 모든 사제를 선교사로 용어를 통일한다", "제2조 한국 교회에 공통된 지도서를 간행한다", "제3조 이 결의 사항들은 교황청의 승인 후 의장에 의해 공포되고 그로부터 3개월 후에 발효된다"라는 내용이다. 그리고 본문은 제1편 신앙의 증진(de Fide promovneda), 제2편 품행의 규율(de Morum disciplina), 제3편 경신례 특히 성사(de Cultu divino et speciatim de Sacramentis), 제4편 성직자와 교회의 세속 재산(de bonis temporalibus cleri et Ecclesiae) 등으로 나뉘어져 있다.
제1편 신앙의 증진 : 24개 조항으로 구성되었으며 설교, 교리 교수 제도, 사목, 가톨릭 운동, 교황 등의 5장으로 분류되어 있다.
제1장 '설교'는 4~6조의 3개조로 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본당에서는 주일과 파공 축일 미사 중에 설교를 해야 한다. 신부가 공소를 방문하였을 때 가능한 한 매일 미사 중에 설교를 해야 한다. 설교에서는 부정적으로 신자들만 나무라지 말고 특히 성서의 말씀과 사실에 근거하여 신경과 계명을 명료하게 설명해야 한다. 7~14조로 구성된 제2장 '교리 교수 제도'에서 7조는 각 교구 대표들로 구성된 교리서 개정 위원회에서 통일된 새 교리서 《천주교 요리 문답》(1934)이 편집되어 곧 간행될 것임을 알리고 있다. 8조에서는 새 교리서의 교회 법규 편에 혼인에 관한 문답 조문을 추가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새 교리서의 교회 법규 4조에 교무금에 관한 법규와 함께 혼인에 관한 법규가 추가되었다. 이 지도서에는 교무금에 관한 법규는 수록되어 있지만, 혼인에 관한 법규는 수록되지 않았다. 9조부터는 종교 교육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즉, 선교사들은 자녀들의 종교 교육이 부모에게 매우 중대한 의무임을 신자들에게 상기시켜야 한다. 만약 부모들이 이 의무를 등한시하고 두 번 훈계한 후에도 교정의 표시가 없으면 그들에게 성사를 주지 말아야 한다. 교리 문답을 외우고 찰고하는 것은 한국 교회의 오래된 관습이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은 해마다 아이들과 어른들로부터 찰고를 받을 의무가 있다. 또 선교사들은 문답의 설명을 교리 교사의 자유 재량에 맡기지 말고 주교의 승인을 받은 교사용 주석서 대문답의 기준에 따라 행해지도록 돌보아야 한다. 본당에서는 주일 성체 강복 전이나 보다 적당한 시간에 아이들과 어른들에게 문답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 14조에서는 미신에 관련된 물건을 집에서 없애고, 교구장의 결정대로 가톨릭 신앙을 공적으로 받아들일 의사를 표명한 사람들을 예비 신자라고 하며 이 예비 신자들은 적어도 6개월간의 시험기를 거쳐야 한다고 하였다.
회장 제도에 관해서는 15~17조에서 자세히 설명하였다. 회장에는 정주(定住)회장과 전교회장 두 종류가 있다. 정주회장은 신자 공동체의 대표로 보수를 받지 않는 일종의 명예직이다. 반면 전교회장은 선교사와 더불어 그의 지도를 받으며 비신자들에게 신앙을 전하는 사람들로 보수를 받는다. 남자만이 아니라 여성들도 이 두 가지 회장에 임명될 수 있다. 회장들은 해마다 피정을 해야 하고 또 그들의 임명자는 주교와 본당 신부이다.
제3장 '사목'은 18~21조까지이다. 본당 신설을 준비하기 위하여 교구장은 지역의 경계를 정확하고 또 가능한 한 행정 구역 구분 기준에 따라 결정한다. 본당 신부는 본당의 수지 보고 외에도 1년에 한 번 맡은 지역의 영적 상황에 관한 보고서를 정해진 양식에 따라 교구장에게 제출하여야 한다. 또한 본당 신부는 적어도 1년에 두 번, 즉 가을과 봄에 자신이나 보좌 신부로 하여금 공소를 방문하게 하여야 한다. 그러나 신부들에게는 외적 법정에서 재치권의 강제 권한은 없으며 '교구장의 명령과 지시에 의해서만 벌을 줄 수 있다'(21조)고 하였다.
제4장은 '가톨릭 운동과 문서 선교'에 관한 것으로, 22~24조까지인 이 장은 새로운 내용이다. 가톨릭 운동을 위해 일치된 힘을 증진시키고 또 가능한 한 단일한 방법으로 진행시키기 위하여, 우선 해마다 한 번 정해진 시기에 주교들이 지시된 장소에 모여 연장자 주교의 사회하에 각자가 준비한 의제를 심의하고 가톨릭 운동을 통해 그것을 증진하도록 결정한다. 둘째, 각 교구에는 가톨릭 운동 지도 협의회를 두고 교구장은 그것을 주재하고 회원들을 선출한다. 셋째, 본당에서도 가능하면 본당 신부에 의해 구성되고 조정되는 가톨릭 운동 위원회를 둔다. 넷째, 초교구 위원회가 필요할 경우에는 주교 중 한 사람에게 그것을 돌보도록 위임한다. 23조는 문서 선교에 대한 내용이다. "주교들은 가장 설득력 있게 쓰여진 말들을 우리 시대의 사도직에서 최고의 효력을 발휘하도록, 또 책과 소책자들이 민중들의 이해와 활동에 맞게 간행되고 보급되기 위해 결코 미경험자에게 맡기지 말아야 한다. 신부들은 직접적으로는 종교 서적의 저술과 번역, 보급을 통하여, 간접적으로는 아이들에게 독서와 작문을 가르침으로써 선교 사목을 추진할 중대한 의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24조는 전국 출판 위원회를 구성한다는 것으로, 그 임무는 세간의 출판물에 포함된 반신앙적이고 반윤리적인 것을 발견하고 주교들의 명으로 반박하는 일, 가톨릭 서적과 소책자와 신문의 간행을 증대하는 일 등이다.
제25조는 전교회에 관한 것으로, 한국 시노드는 모든 선교사와 신자들이 전교회를 힘껏 발전시키도록 간절히 권한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신심회는 예수 성심회, 성모 성심회, 매괴회, 성의회, 성영회 등 5개라고 하였다. 26조는 평신도의 설교에 대한 것으로, 명백하게 검증되지 않은 평신도는 종교에 관한 공적 설교를 할 수 없다고 규정하였다. 즉 교리와 윤리에 대한 세심한 심사 후에 발급된 교구장 문서인 허가서 없이는 설교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제5장 '교황'에 관한 27조에서는 성직자와 신자들에게 교황에 대한 존경심을 보존하고, 교황이 지상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교회 일치의 중심으로 공경받도록 모든 본당에서 성 베드로와 바오로 축일 다음 주일을 교황 주일로 지내라고 지시하였다.
제2편 품행의 규율 : 신학교, 성직자의 규율, 평신도의 규율 등 3장으로 분류되어 있다.
제1장 '신학교'에 관한 규정은 사제 성소에 대한 부모의 본분을 강조하고 있다(28~31조). 신부들은 부모에게 아들의 성소가 가족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특별한 은혜임을 올바로 인식하도록 가톨릭적인 의미를 깨우칠 어떠한 기회도 놓치지 말라고 하였다. 또한 주교들은 사제 성소에 마음이 끌린다고 생각하는 젊은이의 결심을 바꾸게 한 사람에게 그것이 무거운 죄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야 하며, 자식이 일단 신학교에 받아들여지면 그것으로 자식에게 필요한 재물을 힘껏 배려할 본래의 의무에서 면제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부모를 방임하지 말라고 권고하였다. 또 장남과 외아들의 경우, 신학교에서는 그 사제 성소가 개연적으로 확실히 증명되고 또 목표에 도달할 것이라는 희망이 있기 전에는 받아들이지 말라고 규정하였다.
제2장 '성직자의 규율'에 속한 32~33조에서는 사제로 서품된 지 만 5년이 안 된 신부들은 신학이나 교회법 박사 학위를 받지 않은 한 피정 전에 교구장이 지정한 학과 시험을 구두와 필기로 치루어야 하고, 또 3개월마다 하루는 강의를 듣고 토의를 하면서 명상의 날로 지내도록 명하였다. 성직자 복장에 관한 34조에서, 성직자는 집안이나 밖에서 늘 유럽식 수단의 착용을 고수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교구장의 명백한 허가 없이 평신도 복장으로 대중 앞에 나타날 수 없으며, 만약 신부로 인식될 수 없을 만큼 평신도 차림으로 공적 장소에 나타난다면 그는 '성무 집행 중지 처벌을 받게 된다'고 규정하였다.
여자와의 관계는 무려 9개 조항(35~43조)에 걸쳐 사천 시노드의 규정들이 되풀이되는데, 그 엄격성은 사천 시노드를 능가한다. 나열된 여자에 대한 금기 사항은, 첫째 나이와 신분에 관계없이 여성과의 모든 관계에서는 매우 신중하게, 특히 경솔한 언동을 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둘째, 이 규정들은 학교 여교사, 여자 교리 교사, 여자 전교회장 등과의 관계에서도 정확하게 적용된다. 셋째, 따라서 여자들과 선물을 주고받거나 편지를 교환하는 것은 피하도록 해야 한다. 넷째, 어떠한 구실로든 여자를, 비록 여아일지라도 만지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다섯째, 주교는 신부가 사무실 또는 침실에서 사람들을, 특히 여자들을 면접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여섯째, 여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인 경우에도 신부 개인방에 여자를 받아들이는 것을 엄금한다. 의심이 있을 경우에는 다른 여자를 동반해야 한다. 일곱째, 가정부는 신부의 어머니나 누이가 아니고 또 45세 이하일 경우에는 교구장의 허가가 필요하다. 여덟째, 42조와 43조는 한국의 풍습이 반영되어 있다. 즉 신학생들이 성품성사를 받기 전에 알게 된 여자를 후에 가정부로 고용한다는 계약의 체결이 엄금된다. 또한 성직자와 신학생이 양자나 양녀로, 양부모, 의형제 또는 의자매로 결연하는 것도 엄금하고 있다.
제3장 '평신도의 규율'에 관한 46~48조에서는, 먼저 사제가 부족하였기 때문에 부활 시기를 1년으로 연장한 관습이 취소되었음을 밝혔다. 그동안 한국인 신부가 증가하여 불필요한 관습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약혼한 사람들의 나이와는 상관없이 약혼한 남자가 약혼녀의 집에 같이 기거하는 것을 금지하고, 세례받은 아들이나 딸을 관면 없이 미신자와 결혼시키는 부모에게는 그 일 자체로 파문을 선고한다고 하였다.
제3편 경신례 특히 성사 : 49조는 본당이나 공소 신자들에게 미사와 각종 신심 예식을 위한 성당이나 공소 건립 협조를 권고하고, 50조는 미사 때 사용할 공식 기도문, 미사가 없는 공소에서 미사를 대신할, 이른바 대송 기도문은 교회에서 승인된 기도서 즉 《천주 성교 공과》의 기도문만을 사용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성사편에서는 고해성사와 혼인성사를 제외한 다른 성사에 대해서는 별다른 규정이 없고, 다만 고해성사에서 여자의 고해를 듣는 규정(51~53조)을 삽입하였고, 혼배 성사에서는 56~57조가 추가되었다. 여자의 고해를 듣는 규정에 대해서, 고해소는 눈에 잘 띄는 장소에 설치하고 고해하는 여자와 철저히 격리되도록 발 같은 것을 고정시켜 놓아야 하고, 또 중대한 이유가 없으면 일출 전이나 일몰 후에는 여자들의 고해를 들어서는 안 되고, 더욱이 개인 집에서 여자의 고해를 들어야 할 때는 방문을 열어 놓아야 한다. 54조와 55조는 보속에 대한 규정으로, 고해소에서 신자들이 바치는 금전은 비록 미사 예물일지라도 받아서는 안 되고, 또 벌금으로 보속을 주는 것도 금지하였다. 혼인성사에서 첨가된 56조는, 성급한 혼인을 피하도록 하는 공시(公示)는 당사자들의 본당 두 곳의 문 앞에 게시해야 하지만 공소에서도 경당 문에 공시할 수 있다. 그리고 57조에는 교회에서 하는 혼인성사는 시민혼에 앞서 거행되어야 하지만, 두 혼인 사이의 시간적 간격이 너무 길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 붙여졌다.
제4편 성직자와 교회의 세속 재산 : 이 편에서는 성직자의 세속 재산과 교회의 세속 재산이란 두 장으로 나누어 재산의 관리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다. 58~74조까지가 포함되어 있으나 개인 재산의 관리, 특히 교회 재산의 관리에 대해서는 거의 완전히 보편 교회법의 되풀이에 불과하며 시노드에서 특별히 규정된 조항은 없다. 그래도 시노드에서 규정되었다고 볼 수 있는 몇 가지 규정이라면, 예컨대 성직자의 세속 재산 규정은 모든 신부에게 의무적으로 적용되지만 신학생에게도 차부제 때부터 그 규정들에 대한 의무를 명백히 이해시켜 자유롭게 받아들이도록 배려해야 한다는 58조이다. 또한 주교들의 염려 중 하나가 교구 신부와 수사 신부들에 대한 부양의 보증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제대의 봉사에서 오는 수입으로 친척들을 부양하고 재산을 축적하는 것을 방지하려 한 것이다. 그래서 주교들은 모든 신부들에게 철저하고 정확한 부기를 의무화하였고(59~61조), 또 주교들은 나이가 많거나 병든 신부들을 부양할 책임을 핑계로 선교 사업에서 지나치게 절약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63조)는 조문 등을 들었다.
반포 과정 : 무니는 1931년 10월 28일 롯숨 추기경에게 '시노드의 의사록과 결의 사항'의 사본 1부를, 살로티 대주교에게는 사본 4부를 보냈다. 동봉한 같은 날짜 편지에서 그는 시노드 참가자들의 훌륭한 정신, 진심으로 단결된 분위기, 모든 참가자들이 한국 백성에게 보인 호감, 교황에 대한 존경을 칭찬하였다. 또 10월 31일에 보낸 편지에서는 시노드의 결의들이 비교적 짧아진 첫 번째 이유는 자신 때문이라고 밝혔다. 즉 가능한 한 간결하게 표현하고, 항상 지역 교회의 유익에 유념하면서 다른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간행할 예정인 지도서에 맡기도록 고집하였다고 밝혔다. 그래서 그는 지도서의 간행이 이미 계획되었음을 고려하여, 시노드의 결의들에 대하여 교황청의 빠른 승인을 소망한다고 하였다. 무니가 시노드 동안에도 몇번이고 되풀이하여 결의들이 짧고 간결하게 작성되기를 희망하였다면, 그것은 교황청의 보다 쉬운 심사와 빠른 승인을 고려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니는 곧 간행될 지도서를 시노드의 가장 유익한 성과 중 하나라고 하였으며, 주교들이 시노드 동안에 지도서의 초안을 완성하였다면 1932년 2월 말의 주교 회의에서 결정적으로 지도서를 완성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살로티 대주교는 포교성에 속한 2명의 고문으로부터 이 시노드 결의문에 대한 전문적인 의견을 청취하였다. 두 사람은 한국의 시노드에 관해 매우 적극적인 판단을 내리고 근소한 수정안만을 제출하였다. 그 결과 포교성은 사소한 수정만을 한 후 1932년 3월 15일자로 승인 교령을 발표하였다. 이처럼 놀랄만큼 빠르게 내려진 승인에 무니는 4월 30일 감사의 편지를 보내고, 6월 26일에는 시노드 규범 3조에 따라 결의를 공포하고 3개월 후인 9월 26일에는 지도서의 준수를 의무화시켰다.
지도서 준비 위원회는 1933년 2월 15일에 마지막으로 모여 27일까지 총 23회의 회의를 통해 지도서에 대한 마무리 작업을 끝내고 2월 말에 개최된 주교 회의에 넘겼다. 주교 회의는 그것을 검토 · 승인한 후 인쇄를 위해 홍콩으로 보냈고 마침내 10월에 인쇄가 마무리되었다. 이에 따라 무니 대주교는 10월 30일에 의사록과 지도서를 교황청으로 보낼 수 있었다.
《한국 교회 공동 지도서》는 1958년에 일부 개정되었으나, 실제로는 성사 편에서 순서가 약간 바뀌었을 뿐이다. 특히 중국의 의례 특히 제사 문제에서 1942년 한국 주교단의 공동 교서로 이미 주지의 사실이 된 서약의 취소와 제사의 공인 사항 중에 아직 미신적인 요소가 남아 있다고 판단하여, 사목적인 배려 차원에서 1932년의 지도서보다 체계적으로 명확히 구별하여 설명하였을 뿐이다. 결국 개정판이 아니라 재판에 지나지 않았다. 1964년에는 《한국 가톨릭 지도서》가 한글로 발행되었다. 이는 라틴어로 된 공동 지도서 전체를 번역한 것은 아니고 당시 가톨릭 출판사의 윤형중(尹亨重, 1903~1979) 신부가 회장과 일반 신자들이 알아야 할 교회 법규, 특히 성사, 성당과 성물, 신심회에 관한 사항들만을 발췌하여 편집 · 간행한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는 뮈텔 주교의 반포문이 없기 때문에 1857년의 한글로 된 신자용 지도서 《장주교윤시제우서》나 1923년의 《회장직분》처럼 공식적인 성격의 한글 지도서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공동 지도서 중에서 많은 부분을 한글로 쉽게 번역하여 널리 보급시키려고 한 점은 의미있다고 하겠다.
한편 이 시노드에서 주교들은 당시 한국 상황에 맞는 새로운 교리서의 편찬을 의결하였고, 위원회를 구성하여 편찬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 결과 154개의 문답식 항목으로 구성된 《성교 요리 문답》(聖敎要理問答)을 보완한 총 320개 항목의 《천주교 요리 문답》이 1934년에 출판되었다.
[문제점] 시노드의 문제점 : 첫째는 명칭 문제이다. 위에서 이미 확인한 것처럼 결코 공의회는 아니었고, 1857년에 이은 두 번째 한국 지역 시노드였다. 둘째는 결의된 74개조 중에서 내용상 새로운 것은 가톨릭 운동, 문서 선교, 교황 주일 등 10여 개조에 불과하고 나머지 대부분은 관례로 전해져 오는 사항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공동 지도서는 그것을 관례라고 밝히지 않고, 그 전의 지도서들에 수록된 것을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공동 지도서의 문제점 : 《한국 교회 공동 지도서》는 보편 교회법전이나, 가장 모범적인 지역 교회 법령집으로 여겨지던 사천 시노드의 규정집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분류법에 따르고 있다. 이 지도서의 총 항목수는 본문 447조, 부록 95조를 합쳐 총 542조이며, 여기서 본문에 편입된 74조를 뺀다 하더라도 468조이다. 보편 교회법 468조, 한국 지역 교회법 74조로 구성되어 있는 이 지도서는 한국 지역 교회 법령집이라기보다는 보편 교회법의 반복이고, 더 정확히 말하면 한국인을 위해서 쓴 보편 교회법 해설서로 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IV. 1995년의 《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
1995년에 《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라는 제목의 새 지도서가 발표되었다. 《한국 교회 공동 지도서》가 공포 · 실시된 지 63년 만의 일이었다.
[준비 과정] 1983년에 새 교회법이 공포 · 시행되기 시작하자 한국 주교 회의는 1932년에 발간한 공동 지도서를 개정하기로 하고, 그 준비의 일환으로 새 교회법을 한글로 번역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춘계 총회에서 위원장 정진석(鄭鎮奭, 니콜라오) 주교를 비롯하여 위원 7명으로 구성된 '교회법전 번역 위원회'에 그 번역을 위촉하였으며 위원회는 1986년 5월에 그 번역을 끝냈다.
번역이 끝남에 따라 번역 위원회는 같은 해에 '교회법 위원회'로 개편하고 공동 지도서의 개정 작업에 착수하여 초안을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완성된 초안은 주교 회의에 넘겨져 심의를 거쳤다. 이렇게 준비된 시안에 대한 의견을 듣기 위해 주교 회의에서는 1988년 3월에 춘계 총회를 마치면서 입법 예고 형식으로 일부 내용을 발표하였고, 1989년에는 소책자로 만들어 전국에 배포하였다. 그리고 시안을 각 교구별로 검토하고 교육한 후 전국적으로 널리 의견을 수렴하여 위원장이 편찬 작업을 끝냈다. 교회법 위원회는 1992년에 주교 회의 춘계 총회에 최종 시안과 영문 번역판을 제출하였고, 주교 회의는 최종적으로 시안을 심의 · 확정한 후 교황청의 승인을 요청하였다. 인류 복음화성은 1995년 1월 23일에 약간의 수정 지시와 함께 지침서를 승인하였고, 위원회는 지적된 곳을 수정한 후 다시 주교 회의에 넘겼다. 주교 회의는 그해 3월 춘계 총회에서 최종적으로 승인하고 이어 4월 16일에는 주교 회의 의장 명의로 개정 지침서를 공포하였으며, 6월 4일 성령 강림 대축일부터 이 지침서의 준수가 의무화되었다.
[구성 및 내용] 구성 : 1995년 공포된 사목 지침서는 본문 5편, 총 256개 조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교회법이 준용할 수 있는 한국의 국가법 조항을 분류 · 정리하고, 부록을 첨부하였다. 본문은 제1편 '하느님의 백성', 제2편 '전례와 성사', 제3편 '사목', 제4편 '선교와 신자 단체', 제5편 '사회'라는 주제 아래 관련된 조문들이 정리되어 있다. 서두에는 한국 천주교 주교 회의의 '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 반포 교령'(1995.4.16), '교황청 인류 복음화성의 인준 교령'(1995.1.23)이 포함되어 있다. 제6편에는 '교회법이 준용하는 한국의 국법'이라는 제목을 붙여, 한국 민법, 가족법, 후견인, 양자, 시효, 유언, 약혼, 부부의 별거, 계약과 변제, 점유의 소권, 화해와 타협 및 중재 재정 등 관련된 국가법 법조문들이 정리되어 있다. 부록에는 각종 사목 문서, 혼인 문서, 각종 통계 양식들과 참고 문헌, 내용 색인이 첨부되어 있다.
내용 : 제1편에서는 그리스도교 신자(1~4조), 평신도(5~8조), 성직자(9~20조), 수도자(21~32조)에 대해 다루었으며, 제2편은 전례(33~46조), 성사(47~123조), 그 밖의 경배(124~136조) 등을 언급하였다. 제3편에는 교구(137~157조), 본당(158~177조), 특수 사목(178~197조)에 대해, 제4편은 선교(198~208조), 신자 단체(209~214조)를, 제5편은 교육(215~221조), 사회 복지(222~235조), 홍보 수단(236~240조), 문화(241~246조), 교회 일치(247~250조), 사회 참여(251~256조) 등에 대해 규정하였다.
[교회법의 보완] 사목 지침서가 공포된 후 1999년 주교 회의 춘계 정기 총회에서는 교황청 국무원에서 요청한 교회법 보완 규범, 즉 보편법에서 명시적으로 각 주교 회의가 입법하도록 위임한 내용들을 심의 · 결정하였다. 그리고 2000년 4월 교황청 인류 복음화성에서도 교회법 보완 규정의 입법을 권유하였다. 그것은 보편 교회법에서 명시적으로 각 개별 교회에 입법을 위임한 사항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에서 명확하고 분명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거나 누락된 사항들을 보완하도록 요청하는 것이었다. 교회법 위원회에서는 이 내용들을 점검하고 해당 위원회의 의견을 들어 2001년 주교 회의에서 확정하고 교황청에 송부하였다. 이 내용들은 후에 사목 지침서가 개정되어 새로 출판될 때 첨가되어야 할 규정들이다. 교황청에서 지적한 구체적 내용들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주교회의가 제정할 수 있는 일반 교령(decretum generale) 즉 개별법(leges particulares)의 입법과 공포 방식(교회법 8조 2항), 고정적으로 독서직과 시종직에 봉사하는 신자들의 연령과 자격 조건(230조 1항), 종신 부제의 양성 규정과 시간 전례 수행 의무 규정(236조, 276조 2항 3호), 사제 육성 지침서 제정(242조), 한국 성직자들의 복장(284조), 사제평의회(consilium presbyterale)의 구성과 기능에서 필요한 사항들(496조), 일정 기한부로 임명되는 본당 사목구 주임의 임명 기한을 최소 6년으로 하는 규정(522조), 본당에 비치되어야 하는 사목 대장(臺帳)(535조 1항), 교구 사제의 은퇴와 요양에 대한 규정(538조 3항), 교회 일치를 위한 실천적 규범(755조 2항), 평신도들의 설교 허용에 대한 구체적 규정(766조), 홍보 매체를 통해 그리스도교 교리를 전달하는 구체적 지침(772조 2항), 예비 신자들에게 베풀 수 있는 구체적 특은과 자격(788조 3항), 종교 교육에 대한 일반 지침(804조 1항),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대중 매체에 출연하는 경우에 대한 지침(831조 2항), 갈라진 형제들에게 성사를 베풀 수 있는 중대한 사유(844조 4항), 성인 세례에 필요한 단계적 입교 예식 지침(851조 1항), 세례의 일반 형식(854조), 입양된 양자에게 세례를 베풀 경우 세례 문서 기재 규정(877조 3항), 견진성사를 받을 수 있는 연령 제한(891조), 견진 대장 기재 규정(895조), 고해소 설치에 관한 규정(964조 2항), 사제품과 종신 부제품을 받기에 적법한 연령(1031조 3항), 약혼이라는 혼인 약속의 규제(1062조 1항), 혼인 당사자의 혼인 전 조사 규정(1067조), 혼인 제한 연령(1083조 2항), 한국 풍습에 맞는 고유한 혼인 예식 제정(1120조), 혼종 혼인에서 양 당사자가 서약해야 할 구체적인 내용(1126조), 혼종 혼인에서 교회법상 형식을 관면하는 규정(1127조 2항), 성당이나 경당에 설치될 고정 제대에 관한 지침(1236조 1항), 한국 천주교회의 의무 축일에 관한 규정(1246조 2항), 참회 고행의 날에 한국 신자들이 지켜야 할 금육과 단식에 관한 규정(1251, 1253조), 모금에 관하여 모든 이들이 지켜야 할 규범(1265조 2항), 교회록의 적절한 운영 규범과 이전(1272조), 세속 재산의 예외적 관리 규정(1277조), 교구의 세속재산 양도 규정(1292조), 교회 재산의 임대 규정(1297조), 평신도 재판관 임명에 관한 규정(1421조 2항), 화해와 타협 및 중재 재정에 관한 규범(1714조), 행정 소원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직무나 위원회의 설치(1733조 2항).
[의 미] 편집자와 교회법 전문가들이 밝힌 이 지침서의 의미와 그에 따른 해석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이 지침서는 한국 주교 회의에서 공포한 '지역 교회법전'이다. 둘째, 이 지침서는 1932년의 공동 지도서를 개정한 법전이지만 단순한 개정이 아니라 새로운 법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 구조와 규범들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를 계기로 근본적으로 바뀌었기에 옛 공동 지도서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해당 조문을 개정하는 것만으로는 그 변화를 모두 수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셋째, 한국 지역 교회법의 원천 사료 중 우선적인 것은 보편 교회법이다. 넷째, 교회법 위원들은 사제들이 이 사목 지침서만 갖고도 일상적인 사목 활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데 불편이 없도록 편찬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한국의 사제들은 예외적인 특별한 사정이 있을 때에만 교회법이나 국법을 참고하면 될 것이다. 다섯째, 중요한 사료는 그동안 한국 교회의 고유법을 수록하여 공포 · 시행한 여러 지도서들이고 또 그 원천 사료는 그때마다의 시노드에서 결의한 규정들이며, 최근의 사료는 1984년의 사목 회의 의안과 주교 회의 결정 및 1986년에 제정된 '10년 기한부 교구 사제 특별 권한' 등이다. 이 지침서의 새로운 점은 '교회법이 준용하는 한국의 국법'이라는 제목하에 교회법과 관련된 민법, 가족법 등을 정리해 놓았다는 것이다. 여섯째, 지역 교회의 문화와 전통 등을 고려하여 보편 교회법을 보완 · 입법하도록 각국 주교 회의에 위임한 사항 중에서 1999년에 한국 주교 회의가 보완 · 입법이 필요한 것으로 결정한 조문은, 예컨대 한국 성직자들의 복장, 교회 일치를 위한 실천 규정, 견진성사를 받을 수 있는 또는 혼인을 할 수 있는 연령 제한, 한국의 의무 축일의 결정 등 40조에 이른다. 일곱째, 보편법에는 각 민족의 고유한 문화 전통과 사회 여건에 보다 적합한 구체적인 세칙을 따로 제정하도록 각국의 주교 회의에 위임하거나 허용한 사항들이 적지 않게 수록되어 있다.
[평가] 첫째, 이 지침서는 보편 교회법 위주로 되어 있기 때문에 한국 지역 교회의 법전이라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서술법은 1923년에 간행된 《서울교구 지도서》에서 비롯되었는데, 그 이전의 지도서에는 보편 교회법의 언급은 커녕 참조조차 하지 않았다. 둘째, 이 지침서가 1932년의 공동 지도서를 개정한 법전이라는 것은 맞다. 그러나 새로운 것은 1983년의 교회법전이지 이 지침서가 아니다. 내용을 되풀이한 것을 새로운 것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셋째, 한국 지역 교회법의 원천 사료 중 우선적인 것은 보편 교회법이다. 그러나 새 교회법전이 한글로 완역된 상황에서,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펴보면 되는데 굳이 되풀이하여 넣을 이유는 없다. 그것은 결국 지역 교회법이 보편 교회법에 우선한다는 원칙을 무색하게 만든 것이다.
넷째, 이 사목 지침서가 그동안 한국 교회의 고유법을 수록하여 공포 · 시행한 여러 지도서들의 내용을 참고하였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전 지도서들의 규정 중 1932년의 공동 지도서에서 성공회의 세례가 유효하다는 220조(《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 58조), 성직자와 수도자는 소속 장상의 허가 없이는 대부모가 될 수 없다는 233조(동 64조 3항), 혼종 혼인에서 비가톨릭의 세례가 의심되는 경우에는 혼종 혼인의 장애와 함께 이종(異宗) 장애(미신자 장애)를 관면해야 한다는 336조(동 111조 3항), 본당은 사목구의 중심이 되는 성당을 말한다는 총칙 2조(동 158조 4항), 제례가 공인된 1958년 지도서의 452조(동 134조 1항) 등을 재확인하였을 뿐이다. 1984년의 사목회의 의안도 새 교회법 위주이지 한국의 고유법이 될 만한 것은 거의 없다. 그러나 교회법이 참고해야 할 국법을 지도서에 수록한 것은 처음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다섯째, 이른바 토착화에 대한 조항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각 민족에게 고유한 문화 전통과 사회 여건에 보다 적합한 세칙을 따로 제정하도록 각국의 주교 회의에 위임하거나 허용한 사항들은 장황하게 서술하고 있다. 특히 성사편에서 보편 교회법 863조에서는 세례 지원자가 14세 이상일 경우 교구장의 사전 허락이 전제되었으나 한국에서는 교구 사제 특별 권한 1조로 그 허락 없이 세례 집전이 가능하다는 것(동 63조 1항), 견진성사에서도 교회법 863조에도 불구하고 14세 이상이거나 위험이 있는 신자에게는 특별 권한 4조에 의하여 어느 신부든지 견진을 집전할 수 있다는 것(동 66조 2~3항), 역시 특별권한 5조 및 1985년 주교 회의의 결정으로 미사를 평일에는 세 번, 주일에는 네 번까지 집전할 수 있다는 것(동 71조), 한국의 의무 축일을 예수 성탄 대축일, 천주의 모친 성 마리아 대축일, 성모 승천 대축일의 3일로 결정한 것은 1985년의 주교 회의 결정과 특별 권한 8조에 기인하는 것이고(동 75조), 또 7월 5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과 9월 20일의 한국 순교 성인 대축일의 외부 행사를 가까운 주일로 옮겨 거행할 수 있다는 1986년의 주교 회의 결정과 특별 권한 9조(동 76조), 설과 한가위가 주일과 겹칠 경우 설과 추석의 미사 경문으로 지낼 수 있다는 1986년의 주교 회의 결정과 특별 권한 10조(동 77조), 세례 미사나 혼인 미사 등 특별한 경우에는 신자들에게 성체와 성혈을 함께 영해 줄 수 있다는 특별 권한 6조(동 80조 1항), 혼인 장애가 없는 것이 확인되면 혼인 공시를 생략할 수 있다는 특별 권한 14조(동 107조 2항), 국법상 금지된 혼인은 교회법으로 관면할 수 있을지라도 교구장의 허락이 없으면 주례하지 말아야 한다는 특별 권한 15조(동 109조) 등이다.
그 외에도 이전 지도서의 관례를 관례로 인정하지 않고 반복하는 데 그친 곳이 적지 않다. 미사나 공소 예절에 참례할 수 없는 경우에 묵주 기도, 성서 봉독, 선행 등으로 대신할 수 있다는 규정(동 74조 4항) 따위가 그렇다.
지역 교회법은 보편 교회법을 보완하는 세칙만의 입법이 아니라 때로는 보편법을 확대한 경우도 있다. 예컨대 교회 법규 네 가지에 교무금법과 혼인법을 추가하여 여섯 가지 법규로 만든 것은 1931년 시노드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현 지침서에는 없지만 과거의 지침서에는 토착화에 관한 규정이 있었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1857년의 지도서에 도입되어 오늘까지 전해 오는 회장 제도는 계속 보완되면서 정착된 것이기 때문에 단순히 묵은 관례로 여겨 폐지시킬 수는 없다.
[전망] 메츨러는 한국과 중국과 일본의 시노드나 공의회에서는 고유한 지방적 · 민족적 · 문화적 지역 교회의 설립과 구성을 위한 확고한 노력의 흔적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특히 한국이 이 문제를 가장 소홀히 다루고 있다.
인류 복음화성의 책임자들은 보편적인 그리스도의 메시지와 교회 구조가 각 문화와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것은 로마로부터 올 수 없는, 지역 교회의 과제임을 주지시키고 있다. 문화와의 만남에 대한 증언, 교황청이 바라고 요구하고 있는 지방적인 적응과 실천은 지역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맡겨진 사명이요 과제임을 새삼 깨달아야 할 것이다. (⇦ 한국 공의회 ; 《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 ; 관습법 ; 《대구교구 지도서》 ; 《서울교구 지도서》 ; 《한국 가톨릭 지도서》 ; 《회장직분》 ; → 다블뤼 ; 롯숨 ; 르 장드르 ; 무니 ; 베르뇌 ; 《장주교윤시제우서》 ; 차쿠 ; 《천주교요리문답》)
※ 참고문헌 Synodus Vicariatus Sutchuensis, habita in districtucivitatis Tcong King Tcheou, anno 1803, Romae, 1891/ 《張主教輪示諸友書》, 1857, 한글 수사본(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Coutumier de la Mission de Corée suivi d'un appendice, Seoul, 1887/ Directorium Missionis Taikou, Hongkong, 1914/ Codex Iuris Canonici, Benedicti Papae XV auctoritate anno 1917/ Directorium Missionis de Seoul, Hongkong, 1923/ 최루수 신부, 《회쟝직분》, 서울 성서활판소, 1923/ Acta et Decreta Primi Concilii Regionalis Coreani 1931, Hongkong, 1932/ Directorium commune Missionum Coreae, iussu Concilii Regionlis 1931 editum, Hongkong, 1932/ Directoriun commune Missionum Coreae, iussu et auctoritate RR. Ordinariorum denuo editum et a Sancta Sede approbatum, 1958/ 윤형중, 《한국 가톨릭 지도서》, 가톨릭출판사, 1964/ Codex Juris Canonici, auctoritate Ioannis Pauli II promulgatus, Vaticana, 1983(한국 주교 회의 교회법위원회 번역, 《교회법전》,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89)/ Josef Metzler, Die Synoden in China, Japan und Korea 1570~1931, Ferdinand Schoningh, Paderborn, 1980/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 1995. [崔奭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