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위원장〕 초대 경갑룡(景甲龍, 요셉) 주교(1983.6~1984.7), 2대 김옥균(金玉均, 바오로) 주교(1985.4~1989.2), 3대 김수창(金壽昌, 야고보) 신부(1989.2~1990.9), 4대 최용록(崔鏞錄,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1990.9~1995.3), 5대 배갑진(裵甲鎮, 베드로) 신부 (1995.3~2002.2), 6대 김수창 신부(2002.2~2003.11), 7대 최창화(崔昌和, 토마스 데 아퀴노) 몬시뇰(2003.11~현재).
〔한국 순교자 현양회 시기〕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1925년 7월 5일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 79위의 시복식이 있은 뒤부터 순교자 현양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할 필요성이 있다는 의견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이어 기해박해 순교 100주년을 1년여 남겨 둔 1937년 11월부터 본격적으로 순교자 현양 사업을 위한 기구나 단체 설립의 움직임이 교회 일각에서 일어나게 되었는데, 윤형중(尹亨重, 마태오) 신부가 순교자 현양탑 건립을 주장하고 경향잡지사에서 여기에 적극 호응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1939년 9월 8일에는 제9대 서울대목구장 라리보(A.J. Larribeau, 元亨根) 주교의 명의로 '조선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 발기인회가 조직되어, 9월 24일 서울의 계성심상소학교(현 계성학교의 전신)에서 발기식을 갖고 약현(현 중림동) 본당의 김윤근(金允根, 요셉) 신부 등을 중앙위원으로 내정한다는 계획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일제 당국의 불허로 설립이 좌절되었고, 동시에 순교 현양탑 건립 운동도 중단되고 말았다.
'한국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는 광복 이후인 1946년 9월 16일 복자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의 순교 100주년 경축 행사를 기점으로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위원장에 윤형중 신부, 경리에 정원진(鄭元鎮, 루가) 신부, 서기 및 중앙 위원에 이완성(李完成, 요한) · 장금구(莊金龜, 요한) 신부를 비롯하여 조종국(趙鍾國, 마르코) · 장면(張勉, 요한) · 박병래(朴炳來, 요셉) · 박대영(朴大永, 베르나르도) 등이 임명되었다. 이후 현양회에서는 박해 시대의 유물들을 수집하여 《경향잡지》에 소개하는 한편 서울의 순교터 확보에 노력하여, 1949년 5월 7일에는 새남터 부지 1,340여 평에 대한 점용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이듬해 한국 전쟁으로 중지되고 말았다.
순교자 현양회의 활동은 휴전 후에 재개되어, 1954년의 성모 성년 경축 행사를 기해 한국 복자 수도회와 함께 한국 가톨릭 사료 전시회를 개최하였고, 1955년 4월 12일에는 다른 사람에게 양도되었던 새남터 사용권을 다시 확보하였다(약 2천 평). 이듬해 7월 8일에는 새남터에 '가톨릭 순교 성지(聖址)'라는 기념탑을 건립하고 순교 현양 대회를 개최하였으며, 양화진 순교터 순례를 계속하였다. 뿐만 아니라 전국의 신자들을 대상으로 순교터 확보 운동을 전개한 결과 1956년 12월에는 마침내 양화진 일대의 부지 1,300여 평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현양회에서는 이 일대를 '절두산 성지'로 명명하고, 다음해 9월 26일에는 서울에서 대대적인 순교자 현양을 위한 가두 행렬(성신중 · 고등학교~명동 성당)을 개최하였다. 그런 다음 1958년 9월의 순교 복자 성월을 전후해서 기념탑 건립 운동을 시작한 결과 1962년 9월 1일에는 절두산 현지에서 '가톨릭 순교 성지 기념탑' 제막식을 갖게 되었다. 한편 대구 대목구에서는 1958년에 순교자 현양회 대구 지부를 결성하고 교구 차원에서 현양 운동을 전개하였다.
〔서울대교구 순교자 현양회 시기〕 병인박해 순교자 26위에 대한 교황청의 시복 심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무렵, 현양회에서는 1963년 5월 최석우(崔奭祐, 안드레아) 신부를 운영 책임자로 선임하여 서울을 비롯한 전국적인 조직체를 갖추고자 노력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듬해 3월 17일에는 전국 위원회를 열고, 2년 뒤에 있을 병인박해 순교 100주년 기념 사업으로 첫째 순교자 유물과 관계 자료 수집, 둘째 순교 전기 발간, 셋째 박물관 건립 및 순교터 확보 운동, 넷째 교구별 순교 복자 성당과 기념탑 건립 등의 계획을 수립하여 주교 회의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주교 회의에서 '그동안 범교구적으로 운영되어 오던 순교자 현양회의 활동을 서울대교구만으로 한정하고, 기념 사업은 각 교구별로 추진하기로 한다'고 결정하면서 현양회의 전국 조직체 결성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후 서울대교구에서는 주교 회의의 결정에 따라 '한국 순교자 현양회'라는 명칭은 그대로 사용하되 그 현양 활동은 교구 안으로 한정한다고 발표하였다. 동시에 최석호(崔奭浩, 바오로) 신부에게 운영 책임을 맡기고 최석우 신부에게 자료 수집 및 연구를 위임하였으며 1965년 9월에는 김창석(金昌錫, 타대오) 신부를 위원장으로 하는 '병인 순교 100주년 기념 사업회'를 발족시켰다. 이후 기념 사업회가 역점을 둔 것은 절두산의 순교 복자 성당과 기념관 건립 운동으로, 이 성당과 기념관 건립 공사는 1966년에 시작되어 다음해 10월 21일에 봉헌식과 축복식이 거행되었다. 이에 앞서 같은 해 9월 1일에는 최석우 신부가 절두산 기념관의 초대 관장으로 임명되면서 '한국교회사연구소'가 기념관 내로 이전되었다.
이때부터 순교자 현양회 사업과 절두산 기념관 및 연구소의 활동은 거의 맞물려 이루어지게 되었다. 기념관은 우선 현양회에서 그동안 수집해 온 순교 유물과 교회사 연구 자료들을 인수하고, 1968년부터는 순교자 유해를 기념관 지하에 마련된 성해실(聖骸室)로 옮기는 작업을 하였다. 그러나 그해 10월 6일 병인박해 순교자 24위 시복식 이후, 각 교구별로 순교자 현양 활동이 이루어지고 이어 1980년대 초까지 주교 회의 차원에서의 시성 운동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사업이 추진되면서 순교자 현양회의 활동은 침체되었으며 절두산 기념관은 별도의 독립 기관으로 운영되었다. 또 1970년 1월 최석우 신부가 가회동 본당 주임으로 전임되자, 1975년 독립 기관이 되기까지 연구소의 활동도 일시 침체에 빠져들게 되었다.
〔한국 순교자 현양위원회 시기〕 서울대교구에서 순교자 현양회 활동의 재개를 모색하게 된 것은 1983년 6월 7일 한국 순교 복자 103위의 시성을 위한 기적 심사 관면이 허락되어 시성 선포가 예상될 무렵이었다. 그 결과 1983년 6월 30일에는 서울대교구의 독립 위원회로 '한국 순교자 현양위원회'(위원장 : 경갑룡 주교)가 발족하게 되었고, 주요 사업으로 순교 기념지와 교회 사적지 확보 및 개발, 순교 기념 박물관과 기념 성당 운영 및 지원, 순교 유물과 관계 자료 수집 및 연구, 지속적인 시복 시성 추진 등이 확정되었다. 또한 1984년 5월 6일 한국 순교 복자 103위의 시성식이 있은 그해, 서울시로부터 서소문 순교터 옆에 위치한 서소문 공원의 부지 사용권을 얻어 12월 22일 그곳에 순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그러나 이 기념비는 1997년에 공원 재개발로 철거되었다가, 1999년 5월 15일에 새 순교 현양탑이 그 자리에 건립되었다.
현양 위원회의 활동은 발족 당시의 지향과는 달리 시간이 지나면서 침체되어 갔는데, 그 이유는 절두산 순교 기념관(제6대 관장 : 박희봉 신부)과 한국교회사연구소(소장 : 최석우 신부)의 활동이 현양 위원회의 활동과 중복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1987년 3월 2일에는 '성지 연구원'(원장 : 오기선 신부)이 창립되고, 그 전해 10월에는 한국교회사연구소 후원회가 '한국 가톨릭 문화 선양회'로 개칭됨과 동시에 순교자 현양 사업을 새로 시작하면서 현양 위원회는 교구 순교자 현양 사업에서 주도적 역할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 와중에도 현양 위원회는 1987년 9월 한국교회사연구소와 함께 《병인 박해 순교자 증언록》을 간행하고, 1988년까지 당고개 순교터를 확보하여 순례지(성지)로 개발하였다.
서울대교구에서는 1989년 2월 17일 김수창 신부를 제7대 절두산 순교 기념관장 겸 제3대 현양 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이후 1989년 3월에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의 무덤 앞에 묘비를 건립하였고, 같은 해 9월 10일에는 앵베르(L.-J.-M. Imbert) 주교와 모방(P.P. Maubant) 신부, 샤스탕(J.H Chastan) 신부의 유해 일부를 삼성산으로 옮겨 안치한 뒤 천묘식과 축성식을 가졌으며, 또한 교구 순교자 현양 사업의 단일화를 모색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 이어 4대 위원장 최용록 신부 재임기인 1991년 5월에는 중림동 성당 내에 건립된 서소문 순교자 기념관이 축성되었고, 1995년 1월에는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 선교 20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이 개최되었지만, 현양 위원회 활동은 기념관 운영으로 국한되었다. 그러다가 1995년 3월 17일 배갑진 신부가 제9대 기념관장 겸 5대 현양 위원장으로 임명되면서 위원회의 활동은 다시 활기를 찾기 시작하였다. 우선 1995년 11월에 문화 선양회가 현양 위원회로 통합되고, 이듬해 2월에는 문화 선양회 합창단이 순교자 현양회 합창단으로 개칭되었다. 또 1996년에는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을 기념하여 그 현양 사업을 다양하게 전개하였으며, 1997년 4월 3일에는 김대건 성인 장학회를 설립하였고, 절두산 순교터를 포함하는 양화진 일대가 사적 399호로 지정되는 데 기여하였다(1997.11.7). 뿐만 아니라 2001년의 신유박해 순교 200주년을 맞이해서는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 순교자를 문화 인물로 선정, 신유박해 순교자에 대한 연구 사업, 초기 순교자들의 시복 시성 추진 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2002년 2월 21일에는 김수창 신부가 다시 제10대 기념관장 겸 6대 현양 위원장으로 임명되었으며, 그해 말에 '서울대교구 한국 순교자 현양위원회' 산하에 절두산 순교 기념관과 한국교회사연구소, 순교자 현양회의 3개 기관 · 단체를 두는 조직 개편이 이루어져 2003년 1월 14일부터 시행하게 되었다. 이것이 현재의 현양 위원회이며 이때부터 김대건 성인 장학회 운영과 합창단 활동, 교회 순례지(성지) 개발과 안내 등 직접적인 순교자 현양 사업은 현양회가 담당하게 되었다. 2003년 11월 27일에는 최창화 몬시뇰이 7대 현양 위원장 겸 순교자 현양 회 지도 신부로 취임하여 2004년 5월 1일 103위 성인 시성 20주년 기념 장엄 미사 봉헌, 9월 18일 제1회 청소년을 위한 순교자 현양 축제를 개최한 데 이어 남종삼(南鍾三, 요한) 성인 묘역 성역화 사업, 한국 천주교회 창설지인 수표교 순례지 조성 사업 등을 전개해 오고 있다. (⇦ 한국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
※ 참고문헌 《경향잡지》/ <가톨릭신문>/ 《가톨릭 사전》/ 윤형중, 《福者修女院과 殉教者顯揚會와 나》, 한국순교복자수녀회, 1972/ 송기인, <한국 가톨릭 교회의 순교자 현양 운동>, 《韓國가톨릭文化活動과 敎會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김진소, 《천주교 전주교구사》 I, 천주교 전주교구, 1998/ 윤선자, 《한국 가톨릭 문화 유산과 절두산 순교 기념관》, 절두산 순교 기념관, 1999/ 절두산 순교성지 홈페이지(www.matys.or.kr/ www.jeoldusan.or.kr). 〔車基眞〕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