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외방선교회

韓國外方宣敎會

〔영〕Catholic Foreign Mission Society of Korea (K.M.S.)

글자 크기
12
한국 외방선교회 본부(서울 성북동).
1 / 3

한국 외방선교회 본부(서울 성북동).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민족과 국가의 벽을 넘어 다른 문화와 종교, 전통과 관습, 언어와 환경 조건 가운데서 만나는 형제 자매들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하고, 그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눔으로써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1975년 2월 26일 최재선(崔再善, 요한) 주교에 의해 설립된 한국 최초의 외방 선교 단체. 정식 명칭은 '한국 외방선교회'이지만 한자권 나라에서는 '한국 외방전교회'(韓國外方傳敎會)로 부른다. 본부는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 1가 120번지에 위치해 있다.
〔설립 과정〕 한국 외방선교회의 설립자인 최재선 주교는 한국 땅에 내려 주신 하느님의 큰 축복과 많은 선교사들의 피땀 어린 노고에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을 품어 왔고, 이제 장성한 한국 교회는 마땅히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보은의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73년 9월 부산교구장직을 사임하고 같은 해 11월 교황청 포교 연맹 한국지부장에 임명되자, 최 주교는 한국 외방 선교회를 태동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들을 수립하여 1974년 추계 주교 회의에서 최재선 · 정진석(鄭眞奭, 니콜라오) · 황민성(黃旼性, 베드로) · 김남수(金南洙, 안젤로) 주교를 위원으로 하는 설립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 위원회는 여러 선교회의 자문을 받으며 한국인 선교 단체의 설립 가능성을 검토하였다. 이후 1975년 2월 26일 춘계 주교 회의에서는 준비 위원회의 보고를 토대로 마침내 한국 외방선교회의 발족을 정식으로 의결하고 설립자에 최재선 주교, 초대 총재에 정진석 주교를 임명하였다. 이후 한국 외방선교회는 주교 회의 산하 단체로서 주교 회의가 임명한 총재 주교의 관할 아래에 있게 되었다.
외방 선교에 대한 논의는 한국 외방선교회의 창립 이전부터 계속되어 왔다. 그렇지만 그때까지는 제반 여건상 여전히 시기상조라는 부정적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며 한국 외방선교회가 창립됨으로써 비로소 한국 교회는 성소 빈곤을 호소하는 세계 교회의 요청에 능동적으로 부응하게 되었고, 바야흐로 '받는 교회'에서 '나누는 교회'로 전환하는 분기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발전 및 변모〕 한국 외방선교회는 주교 회의의 인준 이듬해인 1976년 3월 1일, 신학원을 개원하고 대신학생 16명과 소신학생 33명을 선발하였다. 이 중 대신학생들은 서울 한남동에 위치한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의 공간을 일부 빌려 생활하며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에서 교육을 받았고, 소신학생들은 소신학교 기숙사에서 거주하며 교육을 받았다. 신학원의 초대 지도 신부로는 이홍근(李洪根, 바오로) 신부가, 1979년 2월에는 초대 원장으로 길홍균(吉鴻均, 이냐시오) 신부가 부임하여 선교 사제 양성을 위하여 힘을 쏟았다. 같은 해 4월에는 김남수 주교가 제2대 총재로 선임되었으며 7월에는 한국 외방선교회 후원회가 창립되어 자립 단체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신학원(겸 본원)은 1980년 2월 서울 동선동에 있는 '성 빈센트 드 폴 자비의 수녀회'(현 수원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의 부속 건물로 이전하였다. 그 이듬해 3월에는 김동기(金東基, 미카엘) 신부가 외방 선교회의 첫 사제로 서품을 받았으며, 11월에는 파푸아뉴기니에 최초의 선교 사제로 파견되었다. 그런 가운데 1984년 3월 수원 가톨릭대학교가 개교하자 신학생들은 신학교 기숙사에서 교구 소속 신학생들과 함께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점차 선교회가 발전해 가면서 본원과 분리된 독립 신학원을 마련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선교사 파견 또한 본격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기존의 선교회 체제로는 체계적인 업무를 추진하기 어려워졌다. 이에 김남수 주교는 1987년 2월 총장제를 도입하여 선교회의 초대 총장으로 조원규(趙源奎, 야고보) 신부를 임명하였다. 조 신부는 부임 직후 긴급 현안이 된 신학원(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왕림리) 건립에 전념하여, 그해 7월 15일 기공식을 가지고 1990년 2월에 개원하고 1992년 11월 5일 김남수 주교의 주례로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같은 해 6월에는 동선동에 위치하였던 선교회 본부를 동소문동으로 이전하였다.
이에 앞서 외방 선교회는 1987년 5월 수원교구 내에 있는 성 라자로 마을과 영적 자매 결연을 체결함으로써 대부분이 가르멜회 재속회원인 성 라자로 마을 가족들은 희생과 기도로 한국 외방선교회의 선교 사업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리고 1988년 1월부터는 13명의 신학생들을 대상으로 본 회의 첫 수련이 시작되어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손경수(孫景守, 요한) 신부가 초대 수련장으로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이후 수련은 몇 차례의 변화를 거쳐 현재 '영성의 해'(Spiritual Year)라는 이름으로 계속되고 있다. 이어 같은 해 6월에는 소식을 알리고 정보를 나누기 위한 회보 《외방선교》를 창간하였으며, 이후 이 회보는 《해돋이에서 해넘이까지》라는 제호로 이름이 바뀌어 2005년 12월 현재 통권 제57호가 발행되었다.
신학원이 축성된 직후인 1992년 12월, 파푸아뉴기니에서 선교 활동 중이던 정두영(鄭斗泳, 보나벤투라) 신부가 제2대 총장에 임명되었다. 정 총장의 취임은 외방 선교회 출신 선교 사제가 선교회의 운영을 직접 책임지게 되었다는 것, 그래서 보다 현실감 있고 구체적인 선교 전망을 열어가게 되었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큰 매듭이 되었다. 그런 가운데 선교회는 1995년 9월 선교회 본부를 동소문동에서 현재 위치로 이전하였고 1997년 6월에는 최덕기(崔悳基, 바오로) 주교가 3대 총재로 선임되었다. 1998년 9월에 개최된 제2차 총회에서는 정두영 신부가 다시 총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처음으로 참사회가 구성되어 총장을 돕게 되었다.
한편 외방 선교회는 대희년인 2000년에 설립 25주년을 맞아, 9월에는 명동 주교좌 성당에서 기념 행사를 거행하고, 연세대학교 100주년 기념관에서 기념 음악회도 개최하였다. 이 행사에는 특별히 외방 선교회가 처음으로 선교 사제를 파견하기 시작한 파푸아뉴기니의 마당(Madang) 대교구장인 베네딕트 토 바르핀(Benedict To Varpin) 대주교와, 두 번째 선교지인 타이완 신주〔新竹〕 교구장 리우시엔탕〔劉獻堂〕 주교 일행이 참석하였다. 지난 25년간 선교회의 성장을 지켜 보며 그 가능성을 확인한 한국 주교단은 그해 10월 추계 주교 회의에서, 선교회에 대한 재정적 지원과 교황청 산하단체로의 독립을 논의하였다.
이후 외방 선교회는 2002년 9월 제3차 총회에서 김명동(金明東, 아우구스티노) 신부를 제4대 총장으로 선출하고 회헌 개정 작업과 조직 개편, 양성 위원회와 선교 센터 설립, 선교 지역의 다변화 등 각종 의안들을 다루며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2004년 10월 추계 주교 회의에서는 한국 외방선교회를 서울대교구 설립 사도 생활단으로 결정하였는데, 이로써 선교회의 교회법적 지위가 분명해졌고 총재직도 서울대교구장인 정진석 대주교가 맡게 되었다.
〔영 성〕 한국 외방선교회의 근본 영성은 '감사(感謝) 와 보은(報恩)'이다. 스스로 복음의 씨를 받아들인 한국 천주교회는 무수한 순교 선열들의 신앙을 밑거름으로 하여 여러 이웃 교회들로부터 도움을 받으며 하느님의 은총 속에 성장하였다. 감사와 보은은 신자 개인이든 단체이든 지극히 마땅한 도리라는 것이 창립자의 한결같은 생각이었다. 최재선 주교는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고 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응답하여, 한국 땅에서 복음의 가치를 심고 신앙을 증거한 이웃 교회와 여러 선교회 · 수도회의 형제적 사랑과 도움에 감사하며 그 은혜에 보은하는 길은, 어려운 이웃 교회들에 한국인 선교사를 파견하는 일이라고 여겼다.
한국 외방선교회 회원들은 한국 순교자들을 주보 성인으로 모시며, 순교를 불사한 그분들의 복음적 열성을 본받아 온 몸과 마음, 목숨을 다하여 선교 활동에 매진한다. 또한 창립자의 삶을 본받아 모든 선교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의탁하며, 교회를 통한 하느님 구원 사업의 도구가 되어 순교자적 자세로 최선을 다한다. 이 밖에도 회원들은 창립자의 표양을 따라 기도와 봉사, 그리고 검박한 삶을 통하여 '모든 이에게 모든 것'(1고린 9,22)이 된 선교사의 사표, 사도 바오로의 모범을 본받는다. 그리하여 세계 어느 곳에서나 육화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사랑과 일치의 세계를 구현함으로써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갈망한다.
〔선교 활동〕 외방 선교회는 1981년 11월에 김동기 신부를 포함한 총 4명의 선교사를 처음으로 파푸아뉴기니 마당 대교구에 파견하였으며, 현재는 8명의 선교사가 마당 대교구와 멘디(Mendi) 교구(2004년 진출)에서 본당 사목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 이곳은 본당 관할 지역이 넓은데 반해 교통과 통신 수단, 사회적 제반 여건이 미비하여, 선교사들은 본당 사목뿐 아니라 대민 지원 활동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다.
선교회는 1990년 이래로 타이완에도 지속적으로 선교사를 파견하고 있다. 타이완 가톨릭 교세의 위축과 만성적인 성소자 부족, 그리고 사제의 고령화 현상으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줄 젊은 선교사제들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당시 타이완의 신주 교구 리우시엔탕 주교는 수차례에 걸쳐 본회에 선교 사제 파견을 요청하였고, 마침내 1990년 3월 신주 교구에 3명의 선교 사제를 파견한 것을 시작으로 2005년 현재 7명의 선교 사제가 타이완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본당 사목뿐만 아니라 교정(矯正) 사목과 원주민 사목에도 관여하고, 신자 공동체의 자립을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다.
1996년 12월에는 홍콩에 선교 신부를 파견하여 현재 두 개의 본당에서 사목하고 있으며, 동시에 중국 대륙의 선교를 위한 준비 작업의 일환으로 베이징〔北京〕에도 회원을 파견하여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또한 상하이〔上海〕 한인 공동체를 돌보기도 하고 광둥〔廣東〕 지방에서는 나환우를 위한 복지 사업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아울러 2000년에는 프랑스 샤르트르(Chartres) 교구에서 외방 선교회 사제의 지원을 요청받아 역(逆)선교의 가능성이 논의되기도 하였다.
2001년 3월에는 캄보디아와 러시아에도 선교사를 파견하였다. 캄보디아 캄퐁사옴(Kâmpóng Saóm) 교구에서 일하는 회원들은 아직 기반이 열악한 본당 사목과 더불어, 현지에 진료소를 열어 의료 혜택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으며, 에이즈 환자를 비롯한 소외 계층을 돕기 위한 국제 비정부 기구(NGO) 활동에 종사하기도 한다. 또한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와 함께 찾아온 러시아 선교의 기회에 응답하여 이르쿠츠크(Irkutsk) 교구에 파견된 회원들은 러시아 가톨릭 교회의 뿌리를 내리는 일에도 협력하고 있다.
이 밖에도 선교회는 2001년 아프리카의 차드(Chad)로부터 선교사 지원을 요청받아, 이듬해 당시 총장이던 정두영 신부가 직접 차드를 답사하였으나 제반 여건이 충분하지 못하여 지원을 보류하였다. 그러던 중 2004년 김명동 총장 신부가 케냐 · 탄자니아 · 모잠비크 등지를 답사한 후 같은 해 11월 모잠비크 리칭가(Lichinga) 교구에 선교 사제 3명을 파견함으로써 아프리카 선교의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2005년 7월 현재 국내에 13, 해외 선교에 32, 유학 4명으로 총 49명의 회원이 선교 활동에 종사하고 있으며, 선교 사제 양성 과정에 있는 신학생은 모두 30명이다. (⇦ 외방 전교회 ; → 선교회 ; 최재선 ; 한국 외방 선교 수녀회)
※ 참고문헌  <회헌>. 〔柳鐘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