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1년 초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한덕운은 교회 소식을 알아보기 위해 옹기 장사꾼으로 변장한 뒤 상경하였다. 이때 그는 청파동에 이르러 홍낙민(洪樂敏, 루가)의 시신에 애도를 표하고 그의 아들 홍재영(洪梓榮, 프로타시오)이 부친을 따라 순교하지 못한 것을 엄하게 질책하였다. 또 서소문 밖에서 최필제(崔必悌, 베드로)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러 주었다. 그러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여러 차례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결코 다른 사람을 밀고하거나 형벌에 굴하지 않았다. 그런 다음 동료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남한산성으로 이송되어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2년 1월 30일(음 1801년 12월 2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 남한산성 ; 신유박해)
※ 참고문헌 St. A. Daveluy, vol. 5, 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ée(1858년 필사 정리), M.E.P. 소장/ 《사학징의》/ 이기경 편, 《벽위편》/ 《순조실록》/ 샤를르 달레,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 천주교회사》 상, 한국교회사연구소, 1979/ 차기진 역주, 《윤유일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시복 자료집》 3집, 천주교 수원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 1998/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특별위원회 ,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2003. 〔車基眞〕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