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10월 25일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에서 한석명(韓錫命)과 장숙명(張淑命)의 차녀로 출생하였다. 1926년에 베를린 세계 만국 아동 그림 전시회에 입상하는 등 그림에 남다른 소질을 보여 1931년부터 그림 공부를 시작하여 일본인 화가에게 사사하였다. 부산고등여학교(현 부산여자고등학교) 재학 시 폐결핵을 앓아, 1937년 졸업 후에는 요양 생활을 시작하였다. 1940년에 부친의 친구인 김덕경(金德卿)의 차남 진흥(振興)과 결혼하였으며, 이때부터 그림 대신에 글쓰기에 전념하였다.
1942년 잡지 《신시대》의 장편 소설 모집에 <등불 드는 여인>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하였다. 조선 연극 협회 작품 모집에 희곡 <마음>(1943)과 <서리꽃>(1944)이, 1948년에는 부산의 《국제신보》 장편 소설 모집에 <역사는 흐른다>가 당선되었다. 이어 계속해서 많은 단편들을 발표하였으며, 1956년에 첫 창작집 《월훈》(月暈)을 간행하였고, 1957년에는 인간의 내면 의식을 파헤친 단편 <감정이 있는 심연>으로 자유문학상(1958)을 수상하였다. 1961년 11월 《사상계》에 4 · 19 혁명을 다른 <대열 속에서>를 발표하였으며, 이후 한국 고유의 여인상에 대한 깊은 관심과 통찰을 절절하게 보여 주는 <유수암>(流水庵)(1963) · <생인손>(1981) · <송곳>(1982) 등의 작품을 썼다.
이 밖에 소설집으로 《빛의 계단》(1960) · 《만남》(1986) 등이 있는데, 특히 정약용(丁若鏞)의 일생을 주제로 한 《만남》은 1992년에 미국에서 영역 출간되어 호평을 받았다. 수필집으로는 《열길 물 속은 알아도》(1963) · 《이 외로운 만남의 축복》(1981) · 《내 마음에 뜬 달》(1990) 등이 있다. 1962~1985년 국제 펜클럽 한국 본부 이사, 1978년 한국 여류 문학인회 부회장, 1979년 한국 소설가 협회 대표위원(부회장), 1980년 한국 문인 협회 이사와 한국 여류 문학인회 회장, 1986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1990년 한국 소설가 협회 상임 대표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 수상 경력으로는 1973년 신사임당상, 1986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및 대한민국 문학상 대상, 1989년 3 · 1 문화상 예술 대상, 1991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등이 있다.
한무숙은 폐결핵으로 입원하면서 천주교를 접하게 되어, 병원에서 교리를 공부한 뒤 1954년에 세례를 받았다. 1967년 3월부터 1968년 6월까지 《경향잡지》에 <세계 성당 순례>라는 제목의 글을 연재하였고, 1984년에는 한국 가톨릭 문우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교회 내에서 많은 활동을 전개하였다. 지극한 신앙적 사명감으로 한국 천주교 수난의 역사를 집필하던 그녀는 지병이 악화되어 서울대병원에 입원하였다가 1993년 1월 30일에 선종하였다. 장례 미사는 2월 3일에 장익(張益, 십자가의 요한) 신부의 주례로 명동 성당에서 거행되었으며 유해는 경기도 연천군 전곡면 신답리에 안장되었다. 사후에 남편 김진흥은 한무숙 문학 재단을 설립한 뒤, 한무숙 문학상을 제정하여 매년 1월 30일에 시상하고 있다.
※ 참고문헌 홍성미, <만남의 작가 한무숙 씨>, 《생활성서》 1988.9/ <가톨릭신문> 1993년 2월 7일자/ http//wowlic.sookmyung.ac.kr/gallery/menu3_4-2.htm. 〔白秉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