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서 교안

海西敎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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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훈이 설립한 청계동 성당과 신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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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훈이 설립한 청계동 성당과 신자들.

해서 교안(海西敎案)은 1900년을 전후하여 황해도의 여러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한 천주교회와 관 · 민(官 民) 간의 충돌 사건을 말한다. 특히 이 교안은 장기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 정부에서 사핵사(査覈使)를 파견하여 사건을 진정시키려 하였다는 점, 그리고 일부 지역에서는 개신교회 측과 마찰을 빚었다는 점 등이 특징적이다
[배 경] 1886년의 한불 조약 체결로 황해도의 천주교회는 활기를 띠게 되었다. 1896년에 황해도 전담 선교사로 임명된 빌렘(N.J.M. Wilhelm, 洪錫九) 신부는 교회의 성장을 위하여 1897년 신천군에 공소를 설립하는 등 교세를 확장시켜 나갔다. 한편 1898년 7월 황해도 서쪽 장연에 본당이 설정되어 파이야스(C.C. Pailhasse, 河敬朝) 신부가 부임하였고, 1899년 5월에는 황해도의 중앙이며 곡창 지대인 재령에 본당이 설정되면서 르 각(C.J.A. Le Gac, 郭元良) 신부가 부임하여 황해도 포교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900년 이후 교세가 대폭 증가하여, 1903년에는 황해도의 천주교 신자수가 전국에서 가장 많았다. 그러나 이와 같이 교세를 신장시켜 가던 천주교회는 1900년 이후부터 황해도 각지에서 관· 민과 충돌을 일으켰다.
급속한 교세 성장 이면에 여러 가지 위험 요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일반 민인들 중 다수는 교회를 지방관의 수탈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곳으로 인식하여 입교하였는데, 특히 황해도는 보수적인 양반층이 상대적으로 약하였기 때문에 현실적인 이해 관계를 좇아서 신자가 되려는 자들도 많았다. 그리고 민인들 사이에서는 지방관을 굴복시키는 선교사의 강한 힘에 의존하고자 하는 '양대인 자세'(洋大人藉勢) 분위기가 만연되어 있었으며, 황해도 지역을 둘러싼 개신교회와의 경쟁이 치열한 가운데 공격적인 선교 방식을 채택하였던 점도 갈등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충분하였다.
〔발 단〕 황해도에서 천주교의 교세가 성장함에 따라서 종래 기득권을 누리고 있던 지방관 · 향반 토호층 · 특권 상인층들은 자신들의 권한을 수호하기 위하여 교회 측과 대립하였다. 특히 1890년대 후반 황해도 천주교회의 핵심 인물로 등장한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安泰勳, 베드 로)의 가문과 비교회 세력 사이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1898년 2월 해주 관찰부가 안태훈의 동생인 안태건(安泰建, 가밀로)을 체포하여 투옥한 후 안태훈에게 출두하라고 요구하여 그도 잡아 가두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1899년에는 안악군의 교졸이 천주교민 4명에게 도적 혐의를 씌워 체포한 사건이 일어났다. 교회 측의 자료에 의하면, 재령의 오용학이란 자가 교민 이준칠의 처를 납치하였는데 그 일이 알려지자 오용학이 이준칠을 도적으로 몰았다는 것이다. 이에 이준칠이 고문을 못 이겨 거짓 자백함으로써 교민 4명이 도적의 누명을 쓰게 되었는데 이 사건으로 안태건이 교민 백여 명을 동원하고, 빌렘 신부가 안악 군수에게 강력히 항의함으로써 교회와 지방관의 교안사로까지 발전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유력한 안태훈 일가의 입교와 천주교 신부의 제반 사회 문제 개입으로 황해도에서의 천주교회와 관 · 민 간의 충돌 사건은 1900년 이후 다른 지역으로까지 확대되어 갔다. 게다가 천주교에 대해서 적대적인 이용직(李容植)이 1902년 6월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하고, 또 천주교회와 개신교회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본격적으로 '해서 교안'이 전개되었다.
〔유 형〕 해서 교안은 1900년을 전후하여 황해도의 여러 지역에서 장기간에 걸쳐 일어났다. 따라서 교안의 원인도 지역별로 다양하고, 전개 양상 및 대립 구도 등도 사안에 따라서 상이하다. 대립 구도를 중심으로 해서 교안의 유형을 나누어 보면, 대체로 교회 측과 지방관, 교회 측과 향반 토호층, 교회 측과 일반 민인과의 대립 사건으로 나누어진다. 각각의 대립 구도에 따라서 교안의 원인도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첫 번째로, 교회 측과 지방관과의 갈등 사건은 신천(1897, 1903) · 안악(1899) · 옹진(1900) · 해주(1901, 1903) · 송화(1901) · 봉산(1901) · 서흥(1903) · 재령 (1903) 등지에서 발생하였다. 이들 사건에는 대부분 안태훈 가문과 같이 전형적인 양대인 자세의 경향을 띄는 교민들이 관여하였으며, 교안의 전개 과정에 반드시 신부가 개입하여 교회 측에 유리하게 처리하였다.
두 번째로, 교회 측과 향반 토호층의 대립 사건은 신천 (1897) · 옹진(1900) · 송화(1901) · 장연(1903) · 서흥 (1903) 등지에서 일어났다. 이들 사건은 대체로 교회측 이 향장(鄕長)을 비롯한 향임(鄕任)층이 가지고 있던 향권을 위협한 데서 비롯되었다. 향반 토호층들은 한말 교회의 성장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있다가 동리 단위로 민인들과 함께 천주교를 배척하거나, 지방관의 힘을 빌려 교회 세력과 대결하기도 하였다. 당시 교회 측과 향반 토호층 간 대립의 주요 원인은 수세권의 향배 문제였다.
마지막으로, 교회 측과 일반 민인들과의 대립 사례는 신천(1897) · 옹진(1900) · 해주(1901~1903) · 서흥 (1901) · 황주(1902) · 재령(1902) · 봉산(1902) · 재령(1902, 1903) · 송화(1903) · 장연(1903) 등지에서 확인된다. 황주 사건은 지역의 경제적 이권을 둘러싸고 교회 측과 보부상 단체인 상무사(商務社) 간에 대립하였던 사례이며, 재령(신환포) 사건은 천주교민과 개신교민 간에 대립하였던 사례로 주목된다. 교 · 민간의 대립은 주로 재산 · 전답 · 금전의 불법 탈취, 교민들의 민인들에 대한 사형(私刑), 교민들에 의한 소나무의 무단 작벌(斫伐), 산송(山訟)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해결과 영향〕 해서 교안이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자, 정부 측에서는 1903년 1월 22일자로 외부(外部) 교섭국장(交涉局長) 이응익(李應翼)을 사핵사(査覈使)로 황해도에 파견하였다. 교회 측에서는 두세(C.-E. Doucet, 丁加彌) 신부를 조정자로 파견하고, 이어서 프랑스 공사관에서는 서기관 트시에를 해주로 보냈다. 황해도 내에서는 정부 측과 교회 측, 공사관 측 대리자들의 조정 노력이 시도되었으나 실패하였다. 결국 사핵사는 해서 교안에 연루된 교민 다수를 체포하여 재판에 회부하였고, 교회에 대한 관 · 민의 공격이 이루어졌다. 교회에 대한 탄압으로 르 각 신부와 이종국(李鍾國, 바오로) 신부가 황해도에서 철수하였고 검거 대상 교민 중 일부도 도피하였다. 뮈텔(G.-C.-M. Mutel, 閔德孝) 주교의 지시에 따라 해서 교안의 교회 측 원인 제공자인 빌렘 신부도 1903년 4월 7일 서울로 소환되었다.
마침내 1904년 프랑스 공사와 외부 대신 사이에 선교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사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은 교안사는 점차 진정되었으며, 해서 교안은 황해도 지역에서 교세를 확장시켜 가던 천주교회 측에 막대한 타격을 주고 종료되었다. 반면 황해도 지역에서 개신교회의 교세는 해서 교안 이후 급속도로 성장하게 되었다.
※ 참고문헌  宋順姬, <海西敎案研究>, 高麗大 碩士學位論文, 1978/ 한국교회사연구소, 《황해도 천주교회사》, 1984/ 崔奭祐, <海西敎案의 研究>, 《韓國敎會史의 探求》 Ⅱ, 1991/ 윤경로, 〈初期 韓國 新舊敎 關係의 史的 考察〉, 《한글성서와 겨레문화》, 1985/ 신광철, <개항기 한국천주교와 개신교의 관계―海西教案을 중심으로>, 《宗敎研究》 11, 1995/ 朴贊殖, 〈天主敎會의 급성장과 鄉村社會 官 · 民과의 충돌―1902~1903년 海西教案을 중심으로>, 《韓末 天主教會와 鄕村社會》, 西江大 博士學位論文, 1995. 〔朴贊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