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적으로 북위 45~48도, 동경 16~22도 사이에 위치하였으며, 국토는 동서로 528km, 남북으로 320km에 걸쳐 있고, 면적은 93,030k㎡로 남한과 비슷하다. 동쪽으로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 서쪽으로 오스트리아와 슬로베니아 및 크로아티아, 남쪽으로 세르비아-몬테네그로, 북쪽으로 슬로바키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고, 총 국경선 길이는 2,171km에 이른다. 유럽 중앙에 위치한 탓에 대륙성 기후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특히 카르파티아(Karpatia) 산맥에 둘러싸여 있어 여름에는 기온이 섭씨 40도를 웃돌기도 한다, 소나기가 자주 내리는 고온 건조한 여름과 눈이 많이 내리는 습한 겨울, 그리고 짧은 봄과 가을의 사계절이 있다. 국토의 대부분(94%)은 비옥한 초원 지대이며, 북부 지역에 타트라(Tatra) 산맥과 마트라(Matra) 산이 위치해 있다. 서부의 볼로톤(Balaton) 호수는 길이가 77km에 달하여 '헝가리의 바다'라고 불리는 헝가리 최대의 휴양지이다. 또한 국토를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로지르는 도나우(Donau) 강은 헝가리의 젖줄이다. 헝가리는 19개 주(megye)로 나누어져 있으며, 수도는 180만 명의 부다페스트(Budapest)이고, 데브레첸(Debrecen), 미슈콜츠(Miskolc), 페치(Pécs), 세게드(Szeged) 등의 대도시가 있다. 인구는 1천만 6,835명(2005.7 현재)이며, 90% 이상이 헝가리 민족인 마자르족(Magyar)이다. 공용어는 핀우고르 어족에 속하는 헝가리어로, 같은 어족에는 핀란드어, 에스토니아어, 그리고 시베리아의 보굴어와 오스티악어가 있다. 대통령제와 내각 책임제가 혼합되어 있으나 수상이 행정을 책임지고 있어 내각 책임제 성격이 강하다. 동유럽 국가로서는 최초로 1989년에 한국과 수교하였고, 시장 경제로 전환한 후 급속한 경제 발전을 이루고 있으며 한국 기업들의 대규모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다.
헝가리인의 조상은 기원전 10세기에서 서기 5세기 사이에 시베리아의 우랄 산맥 동쪽에 거주하던 무리로, 본래는 농사를 지으며 정착해 살았지만 기후가 변하면서 세 방향으로 이동하여 보굴인들과 오스티악인들은 북쪽의 시베리아에 정착하였고, 핀란드인들과 에스토니아인들은 북서쪽으로 이동하여 현재의 북유럽에 정착하였다. 반면 헝가리인들은 남서쪽으로 이동하다 896년, 산맥으로 둘러싸여 방어에 유리한 카르파티아 분지에 정착하였다. 정착 당시 7개 부족의 수장이었던 아르파드(Árpád) 가문에서 지속적으로 왕이 배출되었지만, 1241년 몽골인들의 침공으로 인구의 절반이 몰살당하고 아르파드 왕조가 막을 내리게 되자 1301년부터 1918년까지 단 한 차례를 제외하고 줄곧 외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중세에는 르네상스 문화가 꽃피었으나 1526년부터 150년간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철저히 파괴되었고, 1686년 오스만 제국의 지배는 벗어났지만 이를 도와 주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후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워졌지만,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에서 독일편에 가담한 결과 영토의 70%와 인구의 69%를 빼앗겼다.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후에는 소련에 의해 공산화되었다가 1989년 동유럽 국가들 중 가장 먼저 국경을 개방하였으며, 현재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 체제하에서 꾸준한 경제 발전을 이루며 안정을 찾고 있다. 1999년 폴란드, 체코와 더불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이 되었으며, 2004년 5월 1일 유럽 연합(EU)에 가입하였다.
〔헝가리의 교회사〕 복음의 전래 : 헝가리 민족이 아시아에서 이동하여 유럽의 카르파티아 분지에 정착한 지 약 60년이 지난 964~986년 사이에 카자르(Khazar) 제국이 키예프 공국에 의해 멸망하여, 헝가리는 고대 헝가리 문화의 젖줄인 동쪽 스텝 지역과의 연결 고리를 잃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헝가리인들은 심적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으며, 당시 전 유럽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상황과 맞물려 그 불안감은 더욱 고조되었다. 주위의 그리스도교화된 민족들 속에서, 그리고 독일의 왕인 오토 1세(Otto I, 936~973)에 의해 건설된 신성 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이라는 강력한 그리스도교 왕국 사이에서 헝가리인들은 민족 존립을 위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비잔틴 교회는 952년 이후부터 헝가리 동부 지역에서 주교를 파견하여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중부와 서부 지역을 통괄하고 있던 최고 권력자이자 아르파드의 손자인 턱쇼니(Taksony, 955~972)는 955년 오토 1세와 벌였던 아우크스부르크 패전을 교훈삼아 동로마 교회보다는 서로마 교회로 시선을 돌려, 961년 교황청에 선교를 위한 주교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턱쇼니의 아들 기저(Géza, 972~997)도 이 정책을 이어받아 헝가리를 위협하고 있는 신성 로마 제국에 외교 활동을 펼쳐 유대 관계를 맺고, 서로마 교회의 선교 활동을 장려하였다. 헝가리 최초의 가톨릭 선교사는 972년에 헝가리에 들어온 브루노(Bruno)와 성 볼프강(Wolfgang)이다. 기저 자신도 세례를 받아 신자가 되었으나, 그의 개종은 신앙심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대외적으로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통치자로서 헝가리를 지배할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기에 개종 후에도 이교도의 의식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가톨릭 교육을 받으며 자란 그의 아들 버이크(Vajk)는 그리스도교 국가인 헝가리 왕국을 건국하여 초대왕 이슈트반 1세(István I, 997~1038)로 등극하였으며, 사후에는 헝가리의 스테파노(Stephanus Hungarorum, 969/970?~1038)란 호칭으로 헝가리의 수호 성인이 되었다.
턱쇼니와 기저가 서로마 교회 측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이유는 여러 가지로 추정할 수 있으나, 헝가리의 군사 활동이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력에 의해 좌절되었다는 심리적 원인도 크게 작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헝가리의 서로마 교회 수용은 헝가리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서유럽 그리스도교 문화권의 역사에서도 큰 의미를 갖는다. 헝가리는 우랄 산맥에서부터 시작된 민족 이동 과정에서 습득한 아시아 기마 유목 민족들의 종교 · 세계관 · 의식 구조 등을 버리고, 정착 이후에는 완전히 서유럽 그리스도교 문화권에 속하게 되었다. 따라서 서유럽의 역사 발전 과정을 함께 거쳤으며, 그리스도교 문화권이 다른 종교 문화권 세력에 위협받게 된 시기에는―예를 들어 오스만 제국의 유럽 원정 등―그리스도교 문화권의 최전방에서 이를 막아내는 데 크게 기여해 서유럽 문화가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즉 헝가리는 서로마 교회를 수용함으로써 역사 및 문화 발전을 서유럽과 함께하였으며, 이에 따라 현재와 같은 온전한 유럽 국가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기저는 뛰어난 정치적 선견지명으로 그리스도교 수용의 중요성과 봉건 국가 및 사회 조직 확립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일관성 있는 정책으로 건국의 기초를 다졌으며, 이것이 아들 이슈트반에게 계승되어 그리스도교 교회 조직을 확립한 헝가리 왕국이 건국될 수 있었다. 이로써 헝가리 민족이 온전하게 보존된 것이다. 997년 군주가 된 이슈트반은, 1000년 12월 25일 왕위에 올랐다. 교황 실베스테르 2세(999~1003)는 교황 사절을 보내 왕관을 선사하며 헝가리 왕국과 이슈트반 왕을 인정하였으며, 신성 로마 제국도 이에 동의하였다. 헝가리인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이야기에 의하면, 본래 교황청에서는 왕관을 만들어 폴란드 왕에게 주려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교황 실베스테르 2세의 꿈에 한 손에는 십자가를, 다른 한 손에는 왕관을 든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 그 왕관을 헝가리 왕에게 주라고 권고하였다 한다. 20세기 초에 헝가리 조각가 죄르지(Zala György)는 교황 실베스테르 2세의 꿈에 나타났다는 십자가와 왕관을 든 가브리엘 천사를 소재로 아름다운 조각 작품을 만들어 파리 국제 예술품 경연 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하였고, 헝가리 유럽 정착 1000주년이 되는 1896년 부다페스트에 조성한 영웅 광장 중앙 탑 꼭대기에 그 작품을 올려놓았다. 교황 실베스테르 2세로부터 받은 왕관은 헝가리 국회 의사당 중앙 홀에 전시되어 있다.
이슈트반 1세 즉위 이전에 건립된 베스프렘(Veszprém)의 주교좌 외에도 에스테르곰(Esztergom) 대주교좌를 비롯하여 후에는 컬로처(Kalocsa)에도 도나우 강 동부 지역을 담당하는 대주교좌가 설립되는 등 10개의 주교좌가 탄생하였으며, 행정 단위인 주(州, vámegye)마다 주교들이 파견되어 교회 조직을 총괄하였다. 헝가리의 초기 가톨릭 신자들은 대부분 헝가리 내에 거주하던 슬라브계 사람들이었는데, 이는 헝가리어 가톨릭 용어의 상당 부분이 남슬라브인(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들로부터 유래한 점에서 증명된다. 또 초기에는 헝가리 출신 수도자들이 없어 독일, 이탈리아, 보헤미아 출신의 수도자들이 헝가리에 들어왔으나 기저 군주 때부터 건설되기 시작한 베네딕도회 수도원이 이슈트반 1세에 의해 펀논헐머(Pannonhalma)에 완성되어, 1040년 이후부터는 헝가리인 수도자들이 배출되었다. 이슈트반 1세는 교회에 많은 재산을 선사하였고, 10개의 마을당 1개의 성당을 건축하여 신부를 모시도록 하였고, 그 교회의 유지를 위해 국민들이 공물과 노역을 제공하도록 하였으며, 십일조 의무와 주일 미사 참여를 의무화하는 조치들을 법적으로 규정하였다. 이처럼 가톨릭을 헝가리 왕국의 국교로 정하고 헝가리인들을 개종시킨 것에 대한 공로로 이슈트반 1세는 1083년부터 성인(聖人)으로 공경을 받았다. 이후 유해 이장(移葬) 과정에서 오른손이 썩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하여, 현재 부다페스트에 있는 이슈트반 대성전에 안치하고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왕국의 발전과 곤경 : 라슬로 1세(László I, 1077~1095)는 1091년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지역을 정복해 헝가리 왕국의 행정 조직과 교회 조직에 편입시킨 후 자그레브(Zagreb)에 주교좌를 설치하였다. 1083년에는 이슈트반 1세, 이슈트반 1세의 아들 임레(Imre, Emericus, 1007~1031), 그리고 1046년 이교도들의 반란으로 순교한 겔리르트(Gellért, Gerardus Sagredo, ?~1046) 주교 등 3명이 시성되었다. 그의 조카인 칼만(Kálmán)은 본래 성직자가 되려고 하였으나 왕위를 계승하여 칼만 1세(1095~1116)가 되었다. 1223년경, 당시 중앙 아시아에서 거대한 제국으로 성장한 몽골족이 남부 러시아 초원 지대로 세력을 확장하자, 헝가리는 그들에게 패하여 도망온 러시아인들과 투르크계 유목민인 쿠만족(Cuman) 15,000명을 받아들여 가톨릭으로 개종시킨 후 정착시키고 자치를 인정해 주었다. 신앙심이 깊은 빌러 4세(Béla IV, 1235~1270)는 1241년 몽골의 침입을 받았으나 주변국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하자, 외교 정책의 일환으로 왕가의 정략 결혼을 통해 밀접한 관계를 만들고자 하였다. 즉 4명의 딸을 러시아와 폴란드의 왕자들과 혼인시켜 또다시 있을지도 모르는 몽골의 침입에 대비한 것이다. 하지만 막내딸인 머르기트(Margit)는 아버지의 명을 듣지 않고 수녀가 되어 부다페스트에 있는 토끼섬에서 물질적인 어려움을 이겨내며 평생 동안 수도 생활을 하였다. 후에 머르기트는 성녀로 공경을 받았고, 토끼섬은 오늘날에는 머르기트 섬으로 불려지고 있다. 현재도 당시 수녀원 자리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시기에 지어진 대표적인 성당이 현재 부다페스트에 남아 있는 고딕 양식의 마차시(Mátyás) 성당이다. 13세기 초부터 헝가리 교회에서는 베네딕도회의 영향력이 약해지고 대신 탁발 수도회인 도미니코회가 주를 이루어 쿠만인들을 개종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외국의 지배 :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메드 2세(Mehmet II, 1444~1446, 1451~1481)가 1453년에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후 대군을 일으켜 1456년 7월에 헝가리 왕국으로 진격해 오자 헝가리의 왕이자 보헤미아의 왕이던 라슬로 5세(László V, 1444~1457)는 보헤미아로 도망하였으나, 장군 후냐디(János Hunyadi, 1407?~1456)는 용병들과 일반 귀족, 그리고 평민들로 구성된 2만 명의 군사로 헝가리 남부 국경의 전략 요충지인 난도르페히르바르(Nándorfehérvár, 현 베오그라드)에 진을 치고 오스만 제국군을 맞아 대승을 거두었다. 이로써 오스만 제국의 유럽 침략은 좌절되었으며, 당시 교황 갈리스도 3세(1455~1458)는 그리스도교 유럽을 구원한 후냐디의 승리를 기념하여 세계의 모든 성당에서 정오에 종을 울리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70년 뒤인 1526년 재침략을 받은 헝가리는 모하치(Mohács) 전투에서 대패하여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때 헝가리의 성당들은 대부분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었으나, 가톨릭을 지키기 위한 헝가리인들의 노력은 계속되어 1541년에 실베슈테르(János Sylvester)에 의해 헝가리어로 번역된 신약성서가 최초로 발행되기도 하였다.
16세기 전반에 헝가리의 종교 세계는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되었다. 헝가리는 이전부터 가톨릭을 믿는 헝가리인과 수적으로는 적지만 그리스 정교회를 따르는 루마니아인, 루테니아인, 그리고 세르브인들이 함께 생활하는 다민족 국가였다. 종교 개혁 운동은 1510년대부터 헝가리에 유포되기 시작하였으나, 당시 종교 개혁 운동은 법으로 금지되었기에 일부 추종자들은 화형에 처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헝가리의 왕 트랜실바니아의 야노시 1세(János I)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페르디난트 1세(Ferdinand I, 1536~1564)가 모두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것과는 별개로, 지주와 일반 귀족, 그리고 후에는 고위 귀족들까지도 프로테스탄트를 따르게 되었다. 이처럼 종교 개혁이 헝가리 내에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점령된 지역의 교회 조직이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헝가리에서는 지주, 귀족, 지방 자치 단위, 그리고 도시 등이 교회 성직자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7세기에 교황이 오스만 제국에 대한 성전(聖戰)을 독려함에 따라 합스부르크 왕가, 폴란드 왕국, 베니스 왕국의 연합군이 구성되어 1688년 베오그라드를 함락시켰으며, 1697년에 젠터(Senta)를 회복한 후, 1699년 1월 26일에는 카를로비츠(Sremki karlovici)에서 오스만 제국과 평화 조약을 맺음으로써 150여 년에 걸친 헝가리 왕국의 분열과 터키의 지배는 끝났다. 합스부르크를 주축으로 한 연합국들은 헝가리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전 유럽의 이익을 위해 이슬람 세력을 물리친 것이지만, 이로 인해 오스만 제국의 뒤를 이어 헝가리의 주권을 획득한 합스부르크 왕가는 카를 6세(Karl VI, 1711~1740)와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40~1780)의 재위 기간을 제외하고는 이슬람 세력처럼 전제 정치를 실시하였기에 헝가리에서는 빈번하게 반란이 발생하였다.
17세기에 헝가리의 교육 기관은 모두 가톨릭 교회와 예수회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1635년 예수회원인 파즈마니(Péter Pázmány)가 노디솜보트(Nagyszombat)에 철학부와 신학부 및 법학부까지 개설하여 설립한 대학은 수차례의 이전을 거친 후 현재에는 부다페스트 국립대학교로 지속되고 있다. 그리고 1674년에는 코시체(Kosice, Kassa)에도 가톨릭 대학이 설립되었다. 18세기에도 헝가리의 교육, 문학, 예술은 가톨릭 교회에 의해 주도되었다. 모든 학교 교육은 라틴어로 행해졌으며, 대부분의 중등학교는 예수회에 의해 운영되었다. 1750년경에는 30여 개의 중등학교와 6개의 고등 교육 기관을 운영하면서, 중등 교육 과정에 근대적 목표를 설정하여 자연 과학 과목들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1800년대 초 헝가리 내에서 개혁이 이루어지자, 당시 인구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마자르인들에게 유리한 이 새로운 법안에 다른 민족들은 불만을 품게 되었다. 결국 1848년 빈(Wien)에서 혁명이 일어나 1년 뒤 코슈트(Lajos Kossuth, 1802~1894)의 지휘하에 헝가리 독립이 선언되었으나, 러시아 군대에 의해 몇 달만에 좌절되었다.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의 지원에 힘입어 헝가리에 대한 통치권을 재주장하였지만, 결국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성립되었다.
19세기 초반에는 러시아와 갈리치아(Galicia) 지역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헝가리로 이주하였고, 19세기 중반과 후반에는 여러 작은 신흥 교파들도 헝가리에 퍼지기 시작하였다. 1848년 모든 종교에 대해 평등권이 보장된 이후, 1880년 통계에서는 가톨릭 신자가 인구의 56.14%, 칼뱅교 30.75%, 루터교 4.04%, 그리교 유대교가 7.2%를 차지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에는 유대인은 총인구 대비 5.9%, 각종 신흥 교파의 신도는 전체 인구의 0.1%밖에 되지 않았다. 1920년 6월 베르사유에서 헝가리 대표와 연합국 사이에 체결된 '트리아농(Trianon) 조약' 이후 칼뱅교, 루터교, 그리고 동방 정교회 신자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트랜실바니아 지역의 대부분이 루마니아 영토로 편입됨으로써, 헝가리 영토 내에서의 가톨릭 신자 비율은 이전보다 더 높아졌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헝가리는 독립하였지만, 루마니아 · 체코슬로바키아 · 유고슬라비아 · 오스트리아 · 폴란드 · 이탈리아가 헝가리의 영토를 조금씩 나누어 가짐으로써 영토가 줄었다. 그 일부라도 되찾으려는 노력으로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소련에 대항하여 독일에 협력하였으나 패배한 후, 1920년에 설정된 국경선을 재확인하는 1947년 조약의 이행을 확실시하기 위해 소련 점령 군이 헝가리에 계속 주둔하였다.
공산당 지배하의 헝가리 : 1948년 이후 헝가리 공산당 서기장 라코시(Mátyás Rákosi, 1892~1971)는 당과 정부의 최고 실력자로서 절대 권력을 갖고 스탈린식 독재 권력을 행사하며 종교의 자유를 박탈하려고 하였다. 당시 헝가리 가톨릭 교회의 수장인 민첸티(J. Minszenty, 1892~1975) 추기경은 이를 거부하다 1949년 12월 26일에 체포되어 극심한 심문과 고문을 받고 이듬해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1956년 10월 헝가리 국민들의 반정부 시위로 풀려났지만 공산당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헝가리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1971년 9월까지 머물며 정신적 지주로 남아 있었다. 공산주의 체제하의 종교 박해로, 신앙 생활은 비밀 모임의 형식을 띠게 되어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말까지 그 모임은 약 6,000개까지 늘어났다. 많은 신자들이 사형을 당하거나 1960년대에는 5~16년, 1970년대에는 1~5년형을 받고 투옥되었다. 40여 년간에 걸친 각종 통제와 제약으로 사제의 수는 1948년 5,040명에서 1993년에는 2,300명으로, 같은 기간 동안 수사는 1,780명에서 300명으로, 수녀는 8,956명에서 3,000명으로 크게 감소되었다.
현재 상황 : 민주주의가 회복된 1989년부터 20개의 수도원과 51개의 수녀원이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수도자들의 연령 분포가 대체로 고령층에 속하기에 젊은 사제의 충원률에 비해 기존 성직자들의 사망률이 더 높은 상황이다. 사제 1인당 신자수도 벨기에의 228명, 독일의 353명, 프랑스의 433명에 비해서 헝가리는 2,278명에 달한다. 1992년 말에 가톨릭 교회는 12개의 탁아소, 31개의 초등학교, 20개의 중등학교를 개설하였으며, 1993년에는 두 곳의 교원 대학을 국가로부터 반환받았다. 기존의 7개 신학교 외에도 1991년부터 두 개의 대학교가 가톨릭 신학을 전공 과정으로 개설하였으며, 현재 '신학 아카데미'가 정규 대학교의 자격과 위상을 갖도록 하는 제도 개선 노력도 병행하고 있다.
1990년 2월 9일 바티칸과의 외교 관계가 완전히 회복되었으며, 1991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78~2005)의 방문을 받았다. 1993년부터 가톨릭 교회 조직도 재정비되어 현재 헝가리에는 에스테르곰-부다페스트(Esztergom-Budapest), 칼로처-케치케미트(Kalocsa-Kecskemét), 에게르(Eger), 베스프림(Veszprém) 등 4개의 대교구와 9개의 교구가 있다. 헝가리 가톨릭 교회의 중심은 초기 가톨릭 도입 시기부터 중심 역할을 해온 에스테르곰시이며, 이곳에 추기경이 거주하고 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일반인과 신자들을 위해 주간지 및 월간지를 비롯하여 수준 높은 정기 간행물들을 발간하고 있다.
2005년 현재 헝가리의 가톨릭 신자는 전체 인구의 51.9%이며 칼뱅교 신자는 15.9%, 그리스 정교회 신자는 2.6%이다. 대교구 4, 교구 9, 자치 수도원구 1, 동방 대목구 1, 군종 교구 1, 본당 2,189개가 있으며, 추기경 1, 대주교 6, 주교 21, 신부 2,438(교구 소속 1,910, 수도회 소속 528), 종신 부제 50, 수사 71, 수녀 1,470명이 있다. (← 민첸티 ; 스테파노, 헝가리의 ; 아달베르토, 프라하의)
※ 참고문헌 이상협, 《헝가리사》,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96/ ──, 《헝가리의 종교와 종교의식》, 동유럽발칸연구소, 1998/ Balogh Margit · Gergely Jenö, Egyhazak az ujkori Magyarorszagon 1790-1992, Budapest, MTA Tortenet Intezet, 1996/ Laszlo Kosa, A Cultural History of Hungary, Budapest, Corvina-Osiris kiado, 2000/ Szvak Gyula, Magyar tortenelem, Budapest, Pannonica Kiado, 2003. [劉眞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