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3년경 헤로데 대왕과 사마리아 출신의 말타케(Malthace) 사이에 태어났다. 영토를 크게 늘리지는 못하였으나 헤로데 대왕보다 더 오랜 기간 동안, 비교적 순탄하게 다스렸다. 문헌이나 동전 출토품에는 '헤로데 안티파스'라는 이름을 모두 쓰거나 '해로데'라는 줄임말로 사용되었으며 '안티파스'라고만 불린 예는 찾아볼 수 없다.
〔집권 배경〕 말타케는 헤로데 대왕의 네 번째 부인이었기에, 헤로데 안티파스는 왕국의 후계자 물망에도 오르지 못하였다. 그런데 하스모네 왕가의 핏줄이 흐르는 알렉산데르(Alexander)와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 그리고 서열상 가장 유망한 안티파테르 3세(Antipater Ⅲ) 등 이복형들이 아버지 헤로데의 의심을 받고 처형되었기에 후계자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더구나 헤로데 안티파스보다 우선권을 인정받을 수 있는 이복형 헤로데 필립보(Herodes Phillip)마저 아리스토불루스와 공모하였다는 이유로 기소당하자 아내인 헤로디아(Herodias)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권력 일선에서 은퇴함으로써, 헤로데의 두 번째 유언장에서는 단독 후계자로 급부상하였다. 그 후 친형 아르켈라오(Archelaus), 이복형 필립보와 영토를 분할하라는 내용의 최후의 유언장을 인준받기 위해서 로마의 아우구스투스(기원전 27~서기 14)를 예방하였다.
그동안 유다 전역에서 대대적인 소요가 일어났다. 부왕보다 너그럽게 통치하겠다고 약속하였던 아르켈라오가 치안을 확보한다는 이유로 과월절 축제 인파를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로마로 떠났기 때문이었다. 시리아의 로마 총독 바루스(P.Q. Varus, ?~9)가 신속하게 개입하여 소요를 진압하였지만, 지역마다 메시아로 기대되는 지도자들을 내세워 실력 행사에 들어갔다. 유다에서는 아드론게스라는 목동이, 베레아에서는 헤로데의 동생으로 베레아의 분봉 영주인 페로라스(Pheroras)의 궁정 노예였던 시몬이, 갈릴래아에서는 헤로데 대왕에게 처형당하였던 에제키야의 아들 유다가 들고 일어났다. 이 때문에 바루스는 다시 로마군을 투입시켜 갈릴래아를 평정하고 세포리스(Sepphoris)를 초토화시켰으며,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여 2,000명 가량의 유대인들을 십자가형에 처한 후에야 겨우 소요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이처럼 유다 전역이 들끓고 있는 와중에, 로마에서는 왕위 상속권을 두고 이해 관계가 얽혀 있는 헤로데 왕가 사람들이 대부분 출두해서 자기 주장을 펴고 있었다. 대왕이 병들어 있는 몇 년 동안 영향력을 높여 온 헤로데의 누이 살로메(Salome)도 자기의 몫을 차지하기 위해서 목소리를 높였으며, 헤로데 안티파스도 유언자에게는 더 이상 아무 권한도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최후 유언장에서 친형 아르켈라오의 다음 서열로 밀려난 자신의 위치를, 단독 후계자로 되어 있는 두 번째 유언장에 따라 높이려고 애를 썼다. 아울러 유다에서 온 사절단은, 헤로데 왕가보다는 대사제 와 산헤드린의 통치를 받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헤로데의 유언장을 부분적으로 수정해서 재가하기로 결정하였다. 항상 봉신에 머물러 왕위를 계승할 후계자를 제대로 키우지 못한 헤로데 가문을 왕조로 인정해서, 영토를 계승할 수 있도록 허락한 셈이다. 어찌보면 헤로데 왕가 사람들이 로마 황제 앞에서 자신의 권리를 소리 높여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나, 혈족간 또는 다른 나라 왕가와의 혼사를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자신들에게 왕가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자의식이 뚜렷하였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투스의 이와 같은 결정으로, 아르켈라오는 유다와 사마리아 일대를, 헤로데 안티파스는 갈릴래아와 요르단 강 동부 베레아 일대를, 필립보는 골란과 바타네아, 북부 트랜스요르단 일대를 다스리게 되었다. 살로메 또한 아스돗과 얌니아와 아스칼론 등 해안 도시를 상속받았다.
〔집권 후의 행적〕 헤로데 안티파스가 상속받은 갈릴래아와 베레아는 하스모네 왕조 시절에 유대화된 지역이다. 갈릴래아는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에 함락된 이후 이방인들이 대거 이주해 "이방인의 갈릴래아"(마태 4,15)라는 별명으로 불렸지만, 아리스토불루스 1세(Aristobulus I, 기원전 104~103)가 기원전 104년에 점령한 후에는 강제로 할례를 시키고 유대인들을 이주시켜, 철저하게 율법을 따르는 경건한 민간 신앙이 뿌리를 내린 지역이다. 그리고 베레아는 알렉산데르 얀네우스(Alexander Jannaeus, 기원전 103~76) 이후 유대화되기 시작하여, 헤로데의 동생 페로라스가 분봉 영주로 있을 때에는 이주와 개종을 통해 더욱 동화된 독립적인 도시 동맹체이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아르켈라오와의 세력 균형을 염두에 두면서 부왕의 원칙에 따라 영지를 다스렸다. 아르켈라오가 부왕의 영토 핵심부를 차지하였으면서도 로마 총독의 소요 진압으로 아픔과 상처를 입은 유대인들의 호응을 받지 못했던 것에 비하면, 헤로데 안티파스는 세포리스의 반로마 세력이 완전히 근절된 탓에 그에게 항거하는 움직임이 일지 않아 평화로운 치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정국이 안정된 까닭에 로마의 직접적인 간섭을 받을 필요가 없었으므로, 군사적 · 재정적 · 사회적으로 격변기였던 부왕 시대를 기억하는 백성에게는 태평천하였다.
그러나 서기 6년에 아르켈라오가 유다와 사마리아 주민의 원성을 사서 로마로 소환되자, 헤로데 안티파스 또한 참고인 자격으로 아우구스투스 앞에 출두해야만 하였다. 그때 헤로데 안티파스는 분봉 영주로서 자신의 통치 능력에 의심이 쏠리지 않도록 아르켈라오의 무자비한 통치를 힐난함으로써 자신의 봉토를 무사히 보존할 수 있었다. 이후 헤로데 안티파스는, 신규 건축물에는 자신이 선호하는 헬레니즘 문화를 적극 반영하였지만, 경건한 유대인들의 호의를 잃지 않기 위해 축제 때에 예루살렘을 자주 방문하며(루가 23,7) 동전을 찍을 때에도 그들의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문양을 피하였다. 그리고 부왕처럼 대사제를 선정하는 데 관여하지 않는 등 신중을 기함으로써 자신이 유대인들을 통치할 능력이 있음을 대외적으로 분명히 나타내 보이려고 애썼다.
이렇게 그리스인과 유대인의 서로 다른 이해 관계를 슬기롭게 조정하였던 헤로데 안티파스였으나, 애정 문제만큼은 신중하지 못하였다. 그는 야인(野人)으로 생활하던 이복형 헤로데 필립보를 방문하였다가 그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매료되어, 나바테아(Nabatea)의 공주와 이혼 하고 헤로디아와 재혼함으로써 그동안 평온하였던 정국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다(서기 28). 대내적으로는 "제 형제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추한 짓"(레위 20,21)이라고 규정한 율법을 정면으로 위반하였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으며(마태 14,1-12), 대외적으로는 딸이 이혼당해 친정으로 돌아오는 수모를 받은 나바테아 왕 아레타스 4세(Aretas Ⅳ)가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게다가 이 무렵 헤로데 안티파스는 시리아의 로마 총독 비텔리우스(Vitellius)와 파르티아(Parthia) 왕 아르타바누스 3세(Artabanus III, 12?~38?)의 평화 교섭을 중재하면서, 공식 보고서가 올라가기에 앞서 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사신을 띄워 티베리우스 황제(14~37)의 환심을 사려 하였으나 아무런 수확도 얻지 못한 채 비텔리우스의 반감만 샀다. 이로 말미암아 아레타스 4세가 쳐들어와 크게 패하였을 때(서기 36), 비텔리우스가 군대를 출동시키라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명령을 받고도 늑장을 부려 곤란한 처지에 빠졌다. 나아가 37년에 티베리우스 황제가 서거하고 칼리굴라(37~41)가 새 황제가 되자 새 명령을 받기 전까지는 전투를 할 수 없다고 중단하는 바람에, 아레타스 4세는 헤로데 안티파스의 영토를 유린하고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 해에 헤로데 아그리빠 1세(Herod Agrippa I, 37~41)가 '왕'으로 임명되어 이전에 헤로데 필립보가 다스렸던 영지에 부임하자, 헤로데 안티파스는 처남처럼 '왕'의 칭호를 내려 달라고 로마 황제에게 청원해 보자는 헤로디아의 권유에 따라 칼리굴라 앞에 출두하게 되었다. 이때 헤로데 아그리빠 1세가 보낸 사절단이 도착해 헤로데 안티파스가 파르티아의 왕 아르타바누스와 함께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음해하였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로마에 대항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바테아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군사력을 증강하고 있었던 것이지만, 시리아 총독 비텔리우스의 옹호를 받을 수 없었으므로 왕좌에서 쫓겨나 로마 제국의 서쪽 지역, 즉 리용이나 스페인 북부에 유배되었다.
〔업 적〕 헤로데 안티파스는 부왕의 정책을 이어받아 헬레니즘풍의 도시를 건립하는 데 힘을 쏟았다. 헤로데가 가이사리아(Caesarea)와 세바스테(Sebaste)를 건립하고 헤로데 필립보가 바니아스를 탈바꿈시켰듯이, 헤로데 안티파스도 기원전 4년에 로마군의 소요 진압으로 초토화된 세포리스를 헬레니즘풍의 도시로 재건하여 황제를 영예롭게 하는 의미로 '아우토크라토리스' (Autocratoris)라는 이름을 붙였다. 건축 사업을 활발히 벌이면서도 갈릴래아에 어떤 도시도 세우려고 하지 않았던 부왕과는 달리, 헤로데 안티파스는 영지를 다스리는 통합된 행정 중심지 역할을 염두에 두고 가바라, 타리캐아, 기샬라 등의 도시를 건립하였다. 특히 갈릴래아 호숫가에 새 수도를 건립하고 황제의 이름을 따서 티베리아(Tiberiadis)라 명명하였다. 이 도시는 아름답게 조성되었으나, 공동 묘지였던 곳을 일부 사용했다는 이유로 경건한 유대인들에게는 부정한 도시로 외면당하였다(민수 19,16). 그래서 헤로데 안티파스는 이 도시가 수도로서 제 기능을 하도록 갈릴래아 유대인들을 포함하여 가난한 이들과 노예들과 이방인들에게 집까지 제공해 주면서 이주시켜야만 하였다. 그러나 본래 상업의 요지에 위치해 있어, 유대인들의 반발이 가라앉은 후에는 회당이 생기는 등 서기 2세기에는 마소라 본문과 미쉬나를 편찬하는 유대교의 중심 도시가 되었다.
또한 요르단 강 동편의 베레아에는 나바테아인들을 방어하기 위한 요새 도시 '베타람프타'(Betharamphtha)를 건설하여,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아내 이름을 따서 리비아(Livias)라 명명하였다. 이렇게 건축 사업을 계속 추진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헤로데 안티파스가 다스리는 갈릴래아와 베레아의 재정은 비교적 건실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아테네(Athínai)와 델로스(Delos)가 공동으로 헤로데 안티파스의 선의를 기리는 상을 델로스에 세운 것을 보면, 부왕만큼은 아니지만 외국의 도시들에도 기록이 남을 정도로 후하게 선물을 하였음이 잘 드러난다.
〔신약성서에서의 언급〕 신약성서에는 헤로데 안티파스에 관한 기록이 몇 차례 나온다. 그가 형제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결혼한 것이 율법에 비추어 볼 때 잘못되었다고 비난하는 세례자 요한의 언급(마태 14,1-12; 마르 6,14-28)에서 맨 처음 등장하는데, 성서에 의하면 이처럼 비난을 퍼부었기 때문에 세례자 요한이 죽임을 당하였다고 하지만, 또 다른 기록인 요세푸스(F. Josephus, 37/38~100?)의 《유대 고대사》에서는 소요가 일어나는 사태를 막을 의도로 처형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해로데 안티파스가 예수의 활동을 전해 듣고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의중을 밝히는 부분(루가 9,7-9), 예수가 그를 '여우'라고 단정짓는 내용(루가 13,31-32), 예수가 빌라도 총독 앞에서 재판을 받을 때 심문할 기회가 주어지는 내용 (루가 23,7-12)에서도 잠시 언급된다. (→ 이스라엘 ; 티베리아 ; 헤로데 ; 헤로데 아그리빠)
※ 참고문헌 Bo Reicke, Neuststamentliche Zeitgeschichte: Die biblische Welt 500v.-100n. Chr., Walter der Gruyter & Co., Berlin, 1968(번역실 역, 《신약성서시대사》, 한국신학연구소, 1986)/ E. Mary Smallwood, The Jews under Roman Rule: from Pompey to Diocletian, E.J. Brill, Leiden, 1981/ Francois Castel, The History of Israel and Judah in old Testament Times(허성균 역,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사》,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국, 1992)/ James D. Newsome, Greeks, Romans, Jews: Currents of Culture and Belief in the New Testament World, Trinity Press International, 1992/ L.I. Levine, 《ABD》 3, p. 160/ Seán Freyne, Galilee: From Alexander the Great to Hadrian 323BCE~135CE, T&T Clark Ltd., 1998/ 정태현, 《성서 입문 상권: 성서의 배경과 이스라엘의 역사》, 일과 놀이, 2000. 〔李禹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