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병철 신부는 서품 직후 뮈텔 주교의 보좌이자 조선 치명자 예심 수속 비서관에 임명되어, 교구 재판소의 담당 판사였던 르 장드르(L.-G.A.A. Le Gendre, 崔昌根) 신부와 함께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순교자들의 행적을 조사하기 위하여 전국을 돌아다니며 순교자들의 유해 발굴과 행적 조사에 힘썼다. 1900년 10월에는 인천 제물포(현 답동) 본당의 보좌 신부로 전임되어 본당에 부임한 첫 번째 한국인 사제가 되었다. 그는 신자들에게 교회 사업에 대한 참여 의식을 고취시키고자 성당 종 구입 운동을 전개하여 3개의 종을 주문하여 들여왔다.
1904년 9월 구합덕 본당 2대 주임을 거쳐 1906년 5월 신설된 옥천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는데, 당시 옥천 지역에는 서양인 신부의 세력을 등에 업은 천주교 신자들의 세력이 최고에 달하고 있었다. 이에 홍 신부는 상식에서 벗어난 교우들의 특권 의식과 월권 행위를 강력히 규제 · 단속하고, 선교 활동의 일환으로 1만여 평의 전답을 매입하여 주민들에게 소작권을 주고 입교를 권장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 일본군과 의병 간의 대결이 계속되자 본당이 간접적인 피해를 입으며 사목 활동에 어려움이 생겼고 신자수도 감소하였다. 홍 신부는 이러한 침체된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하여 지대가 높은 곳으로 성당을 이전할 계획을 세우고 죽동(竹洞, 현 죽향리)에 부지를 마련, 공사를 시작하여 1909년 봄 목조 기와 22평 규모의 성당을 완공하였다. 홍병철 신부는 본당 사목 외에도 1910년 간행된 《사사성경》(四史聖經) 번역 사업에도 참여하였으며, <성가 찬미경>을 지어 뮈텔 주교에게 보여 주는 등 출판 분야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처럼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며 교세 확장에 주력하던 홍 신부는 1913년 2월 공소를 순회하던 중 열병에 걸려 3월 5일 옥천군 안읍(安邑)의 방골 공소(현 옥천군 안내면 정방리 방곡)에서 마지막 미사를 봉헌하고 혼수 상태에 빠졌다. 이 소식을 들은 비에모(M.P.P. Villemot, 禹一模) 신부가 공소를 찾아와 병자성사를 주었고, 홍병철 신부는 다음날인 3월 6일 선종하였다. 그의 시신은 현재 옥천 본당 경내에 안치되어 있다.
※ 참고문헌 Liste Des Elèves de Pinang et Liste Des Elèves de G. Séminaire De Ryong-san, 1985/ 《교회와 역사》 103호(1984. 1), 한국 교회사연구소 / 《옥천 본당사》 상, 천주교 청주교구 옥천 교회, 1991/ 《뮈텔 주교 일기》 I · II · 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6 · 1993. 〔洪延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