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2년 유배자들에게 대대적인 사면령이 내려진 후에도 그대로 광주에 눌러 살다가 1839년 기해박해를 당하여 피신해 다니는 교우들을 보살펴 주고 이전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순교 원의를 다졌다. 그러다가 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광주에서 먼저 문초를 받았고, 다시 전주로 이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배교를 거부하면서 신앙을 굳게 지켰다. 마침내 사형 판결을 받고 전주 형장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40년 1월 4일(음력 1839년 11월 30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0세였다. (→ 기해박해 ; 홍낙민 ; 홍봉주)
※ 참고문헌 St. A. Daveluy, vol. 5, 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ée(1858년 필사 정리), M.E.P. 소장/ St. A. Daveluy, vol. 4, Notes pour des Martyrs de Corée(1860년 필사 정리), M.E.P. 소장/ 《사학징의》/ 《일성록》/ 샤를르 달레,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 천주교회사》 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특별위원회,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2003. 〔車基真〕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