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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만 李性萬(1900 ~ 1976)9

대구대교구 신부.세례명은 이냐시오. 1900년 1월 19일 경상남도 진양군 문산면에서 태어났으며 성 유스티노 신학교초등과 · 중등과 · 전문부 철학과를 거쳐, 1926년 5월 성 유스티노 대신학교 신학과를 졸업하여 계산동 주교좌 성당에서 드망즈(F. Demange, 安世華) 주교의 주례로 사제 서품을 받고, 목포의 산정리(현 산정동) 본당 보좌로 임명되었다

이성만 李性萬(1900 ~ 1976)
이성삼 李 ― (1795~1827)9

정해박해(丁亥迫害) 때의 순교자. 세례명은 요한. 《일성록》(日省錄)에 보이는 이유정(李儒定)과 같은 사람으로 이해된다. 그의 본관은 함평(咸平)이다. 대대로 무관(武官)을 지낸 양반 집안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충청도 덕산(德山) 높은뫼(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몽곡리)에서 살면서 두 형 및 누이 이시임(李時壬, 안나)과 더불어 입교하여 열심히

이성주의 (⇨ 합리주의)理性主義9
이성지 李 ― (1778~1835)9

정해박해 때의 순교자. 세례명은 세례자 요한. 《일성록》(日省錄)에 보이는 이유진(李儒震)과 같은 사람으로 이해된다. 그의 본관은 함평(咸平)이다. 대대로 무관 벼슬을 지낸 양반 집안에서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충청도 덕산(德山) 높은뫼(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몽곡리)에서 살면서 24세 때인 1801년에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이후 그는

이수광 李睟光(1563~1628)9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性理學者). 관료 겸 문장가. 시인.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峰). 아버지는 병조 판서를 지낸 희검(希儉)이고, 어머니는 문화 유씨(文化柳氏)이다. 서울 근교에서 성장하였으며, 부친과 외가 5대조 유관(柳寬)의 청백한 삶을 자랑 삼아 스스로 '성시(城市) 속의 은자' 로 자처하였다. 침류대학사(枕流臺學士)

이수광 李睟光(1563~1628)
이순석 李順石(1905~1986)9

조각가. 공예가. 세례명은 바오로. 호는 하라(賀羅) 1905년 1월 7일 충청남도 아산군 인주면 공세리(貢稅里)에서 이병무(李秉武)와 안동 김씨의 9남매 중 막내로 출생. 그의 맏형이 고약으로 유명한 이명래(李鳴來)이다. 어려서 공예에 조예가 깊던 공세리 성당 드비즈(E.Devise, 成一論) 신부의 영향을 받았으며, 13세 때 서울에 올라와 남대문상업학

이순성 李順成(1895~1950?)9

서울대교구 신부. 세례명은 안드레아. 1895년 강원도 이천군 산내면 용포리 대곡동에서 전주에 본관을 둔 이명룡(李明龍)의 7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1923년 5월 20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를 졸업하여 사제 서품을 받은 뒤, 경기도 행주(현 수색) 본당 4대 주임으로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다. 1926년 5월 황해도 해주 본당 2대 주임으로 임명되어 본

이순성 李順成(1895~1950?)
이순이 李順伊(1782~1802)9

동정 순교자(童貞殉敎者). 세례명은 루갈다. 아명은 유희. 서울에서 아버지 이윤하(李潤夏)와 어머니 권 씨(權哲身의 누이동생) 사이의 2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덕이 많은 어머니 권 씨의 보살핌 속에서 독실한 신앙 생활을 하면서 성장하였다. 14세 되던 1795년(정조 19)에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가 입국하자 3일 동안

이순이 李順伊(1782~1802)
이숭녕 李崇寧(1908~1994)9

국어학자. 세례명은 토마스. 호는 심악(心岳). 본관은 연안(延安). 1908년 6월 7일 서울에서 이병관(李炳觀)의 셋째 아들로 출생하여, 1921년 3월 경성공립고등보통학교 부속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 제2 공립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등학교)에 진학하여 1926년 3월에 졸업하였다. 1933년 3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선어 문학과를 졸업하고 그 해

이숭녕 李崇寧(1908~1994)
이스라엘 〔영〕Israel9

지중해의 동쪽 끝에 위치한 중동의 국가. 그리스도교의 발생지이고 최초의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설립되었던 곳. 공식 명칭은 이스라엘국(State of Israel)이며 다당제 의회 제도를 갖춘 민주주의 공화국이다. 북쪽은 레바논, 북동쪽은 시리아, 동쪽과 남동쪽은 요르단, 남서쪽은 이집트, 서쪽은 지중해와 접해 있다. 국교는 없고, 공용어로 히브리어와 아랍어를

이스라엘 〔영〕Israel
이슬람 〔영〕Islam9

7세기 초 아라비아 반도에서 무함마드(Muhammad,571~632)에 의해 창시된 종교. 현재 160여 개 국에 약 12억명의 신자가 있으며, 한국 내에도 3만 5천여 명의 신자들이 있다. "회교"(回敎)라고 부르기도 한다. I . 종교학에서의 이슬람 이슬람은 유대교, 그리스도교와 같이 계시 종교이다. 계시의 주체는 아랍어로 "하느님"이란 의미를 지닌 '

이슬람 〔영〕Islam
이승훈 李承薰(1756~1801)9

최초의 한국인 세례자요, 한국 천주교회 창설 주역의 한 사람. 세례명은 베드로. 본관은 평창(平昌)이고, 자는 자술(子述) 호는 만천(蔓川)이다. 그는 일찍부터 서양의 수학에 관심을 가져 왔으며, 1784년 봄 북경에서 선교사들로부터 세례를 받은 뒤에 귀국하여 같은 해 겨울에 동료들과 함께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였다. 이후 그는 오랫동안 교회의 주역으로 활

이승훈 李承薰(1756~1801)
이시도로, 스페인의 Isidorus Hispalens(5(60?~636)9

성인. 스페인 세비야(Sevilla)의 대주교. 탁월한 저술가이며 교회 학자. 축일은 4월 4일. 이시도로는 스페인의 갈등과 혼란 시기에 가톨릭 교회를 확립시키는 데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그가 태어나기 약 1세기 전에 스페인에 침입하여 도시를 세운 서고트족이 아리우스주의(Anamicmus)를 퍼뜨리자 이들을 가톨릭 교회로 개종시켰으며, 스페인을 가톨릭 국

이시도로, 스페인의 Isidorus Hispalens(5(60?~636)
이시돌 농촌 산업 개발 협회 ― 農村産業開發協會9

제주의 농촌 산업 개발과 사회 복지 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천주교 제주교구의 법인 기관. 주보는 세계 농민의 주보인 '성 이시돌' 이고, 설립자와 현재의 법인 이사장은 아일랜드 출신인 맥그린치(P.J. McGlinchey, 파트리치오, 임피제) 신부. 사업 소재지는 제주도 북제주군 한림읍 금악리 · 대림리 · 한림리. 한국 전쟁 후인 1957년에 설립한 4-

이시임 李時壬(1781~1816)9

을해박해 순교자. 세례명은 안나. 본관은 함평(咸平). 충청도 덕산(德山) 높은 뫼(충남 예산군 고덕면 몽곡리)에서 대대로 무관 벼슬을 지낸 양반가(兩班家)의 3남 1녀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려서 입교한 뒤 오빠 성지(세례자 요한, 일명 儒震), 동생 성삼(요한, 일명 儒定)과 함께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고, 결혼할 나이에 이르러서는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

이신규 李身逵(1794~1868)9

순교자. 세례명은 마티아. 본관은 평창(平昌). 한국 최초의 천주교 영세자인 이승훈(李承薰, 베드로)의 셋째 아들이며, 정약용(丁若鏞, 요한)의 생질. 아버지 이승훈의 비참한 죽음으로 친척의 대다수가 천주교에 반대하는 뜻을 나타냈음에도 불구하고, 이택규(李宅逵, 이승훈의아들)와 더불어 열심히 수계(守誡)하며 신앙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는 문재(文才)와 의술

이신론 理神論 [라]deismus [영]deism9

일종의 계몽주의 신론으로써 종교와 이성의 자율성을 통일하려는 노력. 하느님의 존재와 그가 세계의 창조자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자신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합법칙적인 이성을 통해 규정된 세계의 창조주로서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조. [개념과 정의] 기본 관점 : 이신론에서 하느님은 세계에 대해 진정한 관계를 갖지 못하고, 창조 행위 이후 더 이상 역사 안에 개입

이약슬 李若瑟(1895~1961)9

전주교구 신부. 세례명은 요셉. 1895년 2월 6일 전북 전주군 소양면 양정리에서 태어났으며,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졸업한 뒤 1919년 11월 23일 드망즈(F. Demange, 安世華) 주교의 집전으로 계산 주교좌 본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서품 직후 계산 주교좌 본당의 보좌로 첫 사목 활동을 시작하여 1922년 9월 김천 황금 본당 3대 주임을

이약슬 李若瑟(1895~1961)
이양등 李陽登(?~1868)9

순교자. 세례명은 베드로. 서울 출생으로 박해를 피해 경남 언양(彥陽)의 대재 공소(일명 죽림굴)로 이주하였다. 이곳은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 후 형성된 교우촌으로, 신자들은 토기와 목기를 만들고 숯을 구워 생계를 유지하였다. 이양등은 공소 회장으로 신자들을 이끌었으며, 꿀 장사를 하며 바깥 정세를 살피기도 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이여구 李汝球(1897~1950?)9

서울대교구 신부. 세례명은 마티아. 1897년 2월 6일에 출생한 이여구 신부는 1925년 6월 6일에 사제 서품을 받고 제물포 본당의 보좌 신부로 임명되었다. 1928년 부여 금사리 본당 4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회장들에게 교리 교육과 찰고를 실시하고, 냉담자들을 방문하며, 또 가망이 보이는 외교인 방문 등을 통해 교우들의 신앙을 북돋우고자 하였다. 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