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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전체가 그 수도회의 고유법이 정한 방식에 따라 의결에 참여하는 수도회 내에서 최고 권위를 갖는 대표 기구. I. 의 미 [교회법적인 개념과 본질〕 총회는 회원 전체가 고유법이 정한 방식에 따라 의결에 함께 참여하는 합의체 사단법인이다(교회법 115조 2항). 또한 수도회 내의 최고 권위를 갖는 대표 기구로서 사랑 안에 일치를 이루며 총장의 선출, 안건
기해박해(己亥迫害) 순교자. 세례명은 비르지타(혹은 가타리나). 1839년 원주에서 순교한 최해성(崔海成, 요한)의 고모.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 이전에 천주교에 입교하여 남편과 함께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그러다가 신유박해 때 남편이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을 숨겨 준 죄로 체포되어 유배를 가게 되자, 그녀도 남편을 따라 그곳으로 가서 생활
순교자. 세례명은 미상. 충청남도 직산 출신으로, 첫째 형인 최경헌(崔敬憲)과 둘째 형인 최경희(崔敬喜) 등 3형제가 함께 살았다. 이들은 1862년경에 같은 동네에 사는 윤평심(尹平心)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고, 1866년에 체포되어 12월 15일(음)에 서울 포도청에서 신문을 받았다. 체포 당시 최경원은 25세, 최경헌은 31세, 최경희는 28세였으며
순교 성인.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본관은 경주(慶州). 보명은 영눌(榮訥), 일명 치운 혹은 영환(永煥).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순교자 이성례(李聖禮, 마리아)의 남편이며, 두 번째 한국인 성직자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의 부친. 1805년 홍주 다래골의 새터(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의 다락골)에서 최인주(崔仁柱)

순교자. 세례명은 베드로. 1788년 서울 서빙고에서 태어났으며, 20여 세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의 직업은 목수였고,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일어나자 1868년 봄에 용인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11일(음) 용인에서 김성실(金成實, 베드로) · 오군일과 함께 체포되어 81세의 나이로 서울 좌포도청에서 순교하였다. 한편 《치
주교. 제2대 인천교구장. 세례명은 보니파시오. 1948년 5월 16일 경기도 김포군 양촌면 마산리 278번지에서 최윤봉(파비아노)과 정용환(데레사) 사이에서 6남 2녀 중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1967년 2월에 성신고등학교(소신학교)를, 1974년 2월에는 가톨릭대학 신학부를 졸업하였다. 1975년 12월 6일에 인천 답동 성당에서 인천교구장 맥노튼(W.

순교자. 세례명은 요셉. 본관은 경주(慶州).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순교자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 성인의 친척. 홍주 다래골(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출신으로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가난을 극복하는 인종(忍從)과 열심한 기도 생활로 신자들 사이에서 명성이 높았다. 기해박해가 한창이던 1839년 8월(음) 한 배교자의 밀고로 체포된 그는
주교. 제3대 수원교구장. 세례명은 바오로. 1948년 1월 15일 경기도 평택군 서탄면 수월암리 602번지에서 최준태(야고보)와 박 수산나 사이에서 2남 4녀 중 다섯째로 출생하였다. 1966년에 성신고등학교(소신학교)를, 1973년에 가톨릭대학 신학부를 졸업한 뒤 독일로 유학을 떠나 1975년 아이슈타트(Eichststatt) 대학교에서 신학 석사 학위

주교. 제6대 대구대교구장. 세례명은 요한. 1902년 6월 2일 대구 비산동에서 출생하여 해성재 서당과 성립학교에서 초등 교육을 받았다. 1914년 10월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에 제1회 신입생으로 입학하여 수학한 후, 1926년 5월 29일 졸업과 함께 계산동 주교좌 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서품 직후인 5월 31일에 제주 홍로(현 서귀포) 본당

순교자. 세례명은 미카엘. 서울 북창동에 거주하다가 1868년 3월 29일(음) 체포되어 나흘 만에 서울 좌포도청에서 66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그의 아내 심 마리아와 누이인 최 마리아, 그리고 계수인 김 마리아와 조카 최문성도 이듬해인 1869년에 순교하였다. ※ 참고문헌 《치명일기》 260-264번/《병인치명사적》 21권. 〔方相根〕
대구대교구 신부. 세례명은 베드로. 1924년 1월 27일 원산에서 3대째 내려오는 천주교 집안의 4형제 중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1937년 3월 20일 원산 해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소속 본당이던 원산 본당 주임인 담(F. Damm, 卓世榮) 신부의 권유로 1937년 4월 1일 덕원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일제 말기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 정상적인

서울대교구 신부. 세례명은 베드로. 1881년 5월 16일 충남 공주 서재에서 최제환(요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충남 천원군 목천면 서덕리(서덕골)를 거쳐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덕성리 쇄재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고, 1900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하여 29세가 되던 해인 1910년 9월 24일 사제로 서품된 후, 곧 황량한 동만주 간도 지방인 간도

서울대교구 신부. 세례명은 요한. 1912년 10월 3일 전북 진안에서 출생하였다.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의 성 유스티노 신학교에 입학하여 1927년 3월에 중등과, 1929년 7월에 전문부 외국어과, 1931년 7월에 철학과, 1935년 6월에 신학과를 이수한 후 15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서품 즉시 김제(현 요촌) 본당에서 보좌 신부로 사목

최양업 신부에 이은 두 번째 한국인 신학생.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1866년의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양화진에서 순교한 최수(崔燧, 베드로)와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최형(崔炯, 베드로) 성인의 아우. 충청도 홍주에서 최인호(崔仁浩, 야고보)와 황 안나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경기도 남양으로 이주해 살다가 1836년 초에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이어
덕원 면속구 출신 신부. 세례명은 마티아. 1908년 출생. 덕원 신학교에 입학하여 초대 연길 대목구장 브레허(T. Breher, 白化東) 주교로부터 연길 소속 신학생으로 부제품을 받았다. 이어 1938년 4월 초에 사제 서품을 받고 원산에서 첫 미사를 드렸다. 본래는 3월 21일에 임화길(林和吉, 안드레아), 김보용(金寶容, 루도비코) 신부가 서품될 때

대구대교구 신부. 세례명은 요한. 1919년3월 10일 강원도 원성군 신림면 용암리 749번지에서 최영철(요셉)과 이재유(아가타)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943년 4월에 소신학교인 남대문상업고등학교 을조를, 1945년 3월에 성 유스티노 신학교 예과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1952년 9월 25일에 성신대학(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을 졸업함과 동시에
순교자. 세례명은 바오로. 순교자 최국신(베드로)의 아들로, 중인의 자손이다. 태중 교우인 그는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천주교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고, 몇 년간 정의 배(丁義培, 마르코) 회장 집에서 일반 글과 교리를 배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일어나면서 최봉인도 1868년 가을에 체포되어 20여 세의 나이로 서울에서 순교하였다.
을해박해(乙亥迫害) 순교자.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아명은 '진강' . 일명 '여옥' . 1815~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서석봉(徐碩奉, 안드레아)과 구(최)성열(具性悅, 바르바라) 부부의 사위. 충청도 홍주 다래골(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부친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신앙 생활을 하였으며, 한때는 공주 무성산으로 이주하
순교자. 세례명은 예로니모. 서울 황교(黃橋)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천주교를 접하였으며, 장성해서는 동촌(東村) 이 판서 집의 여종과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다. 그러나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가 일어나면서 체포되었고, 석방된 후에는 교우 과부와 혼인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그는 기해박해 후에도 신앙 생활을 계속하였고, 페레올(J.J. Ferr
평양교구 강계 본당의 회장.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일명 자백(慈伯). 1907년 경북 대구에서 최경집(崔景集, 빈천시오)과 이봉조(李奉祚, 마리아)의 4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서울에서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일본 유학을 떠나 도쿄(東京)의 죠치 대학(上智大學) 예과 2년(철학 전공)을 수료하였다. 귀국 후 평양의 성모보통학교 교사로 부
